이야기는 행복해야 하잖아요. 꼭 그럴 필요는 없어. 아빠는 언제나 행복한 이야기만 해주시잖아요. 너한테는 행복한 이야기가 없니? 우리가 사는 거하고 비슷해요. 하지만 내 이야기는 안 그렇고. 네. 아빠 이야기는 안 그래요. 남자는 소년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사는 게 아주 안 좋니?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나는 그래도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우린 아직 여기 있잖아.
페이지 : 303

 

    이 책은 남자와 소년이 함께 길을 찾아가듯, 생각의 방향을 글에 맡기고 흘러가야 이해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 책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다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작가 ’코맥 매카시’의 이름 하나에 의지해서 글을 하나하나를 손에 묻혀가며 이해하는 더딘 시간이었다.

   미리 사전지식을 갖고 읽는 것보다 왠지 그냥 한 번 책에 나를 맞춰가고 싶은 그런 느낌이 들어 손에 든 "The Road". 읽는 동안, 길을 찾는 아버지와 소년의 모습이 하나의 영상으로 머릿속에서 전개되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 - 타인을 만나거나 잿더미에 불과한 폐허속에서 생존의 몸부림을 치며 음식을 찾고 잠잘 곳을 찾는 일, 똑같은 남아있는 자들이지만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타인을 이해하기란 고상함의 극치이자 쓸모없는 배려임을 보여주는 일 등 - 에서 삭막하고 빈곤한 분위기와 그 이면에 숨겨진 부성애 또는 생존애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I Am Legend"와 같은 시대적 배경, 비슷한 분위기로 느꼈으나, 몇 십장을 넘기면서 그와는 다른, 완전히 불덩이에 다 타버린 폐허가 된 지구, 그리고 알 수 없는 시간속에 곳곳에 살아남은 자들과의 대면,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르고자 하는 남쪽으로의 한 걸음 한 걸음 속에 있는 힘겨움과 처절함이 새로운 충격이 되었다.

    때로는 이미 죽은 자들을 더 축복이라 여기며 아침에 눈뜨는 것이 슬픈 일인 아버지이지만, 이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아들에게만은 이 세상은 행복하고,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우린 지금 여기에 있다”는 위안의 말을 건네며 삶의 진정성 혹은 삶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려는 모습에서 부성애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그냥 나뭇잎으로 덮거나 방치해두는 것이 아니라 생존에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 담요를 덮어주면서 “아빠하고 매일 이야기를 할게요. 그리고 잊지 않을게요”라는 소년의 독백에서 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을 다시 환원하여 원점(아버지)으로 돌려주는 모습은 부성애를 넘어 가족애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힘겨운 길을 가는 동안 아이는 짐이 될 수도 있고, 아이 때문에 먼 길을 갈 수 없었을 텐데 지구에 큰 재앙이 있는 후에도 지금의 좋은 시절에 느낄 수 있는 아버지의 사랑이 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자식이 아버지에게 갖는 존경심이나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한다.

    만약, 이 책 결말 부분에서 아버지와 소년, 둘 다 죽는 경우였다면? 아마 책을 덮는 순간 느꼈던 희망이나 다음 세대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이 처절한 비극에 불과했을 것이다.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왠지 10년쯤 시간이 흘러 소년이 청년이 되었을 때라면 세상은 밝은 빛이 가득하고 잿빛세상은 점점 그 빛을 잃어가지 않을까 하는 설렘이 생겼다. 특히, 뭔지 모르는 엄청난 대재앙 속에 아름다운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아들에게 글 중간중간 과거를 회상하는 아버지의 생각에 아름답고 살 만한 세상을 말로 표현해 주며, 아들에게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준 모습에서 그 설렘은 확신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