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이 되기 위한 한 발의 내딛음

난 백수다. 취업준비생이라는 그럴 듯한 단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무직의 백수일뿐이다.
난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이리저리 빠르게 굴린다. 아! 마침 괜찮은 자리가 있네! 온갖 아양을 다 떨어 쓴 자기소개서에 몇 번은 정장에 타이를 맬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다 돌아오는 길은 집 근처 공원의 벤치. 손에는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 한 잔이 들려 있다. 술 한잔 하기도 버거운 주머니 사정에, 빈 속에 들어가는 쓰디쓴 커피에 죄없는 내 위만 고달프다.
매일 아침이면 나도 출근을 한다.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몰아 출근하는 그 곳은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구립도서관. 뭐 매일같이 발걸음을 옮겨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그리 나쁘지 않다. 게다가 읽고 싶은 책도 공짜로 맘껏 읽을 수 있고 몇 백원이면 커피 한 잔에 사색을 즐기기도 나쁘지 않은 공간이다.

몇 일 전, 군대의 후임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잘 지내? 우리 아무개랑 아무개랑 서울 올라온다는데 얼굴 함 보자!”
2년 동안 동거동락했던 전우들이 그립다. 그런데 호주머니를 뒤져서 나오는 건 아까 커피 뽑아먹고 남은 동전 몇 개 뿐. 술 먹으러 가는 일로 부모님한테 손을 빌리자니 백수인 내 신분이 초라하다. 그래도 현역시절 제일 고참이고 나이도 그 중 제일 많은 내가 무턱대고 돈 없이 모임에 나가자니 용기가 안 난다. 
‘미안하다. 요즘 좀 바빠서. 내 나중에 여유 생기걸랑 연락하마.’
소심하게도 문자로 거부의사를 밝힌 후에 남은 동전으로 커피를 또 한 컵 들이 붓는다. 또 한 번 애꿎은 내 위만 고달프다.
내 유일한 은신처인 도서관을 이곳저곳 둘러보다 ‘고전백일장대회’ 라는 한 팜플렛이 눈에 들어왔다. 독후감은 둘째치더라도 일단 책이라도 함 읽어 볼까? 지정도서목록을 검색하던 중 단연 내 눈길을 끈 이 타이틀.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백수에서 당당한 자유인으로 거듭나기!’
당당한 자유인? 말도 안 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이게 딱 내가 보라고 나온 책 같다. 그리고 난 지금까지 이 책을 손에 쥐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 아웃사이더들의 행동양식을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 완벽히 적용시킬 순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언가 한 수 단단히 훈수 당한 느낌. 
제일 먼저 얼마 전에 나가지 않은 전우들과의 모임에 대한 안타까움부터 밀려왔다. 왜냐면 임꺽정과 그의 친구들이 당당한 백수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는 원동력이 바로 네트워크이기 때문이다. 쉽게 얘기하면 인맥이다. 생각해보면 오랜만에 만난 전우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통해 여러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게 아닌가? 하긴 이번만이 문제는 아니다. 근 1년 동안 내 네트워크는 거의 닫혀 있다시피 했으니까. 취업에 대한 부담감과 돈과 시간에 대한 압박감으로 누구도 맘 편히 만나지 못했다.
그에 비해 꺽정이와 친구들을 보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며 서로가 가진 장점을 나누며 한 마을을 구성해나간다. 혼자 있으면 써먹을 때 없는 재주라도 같이 모이니 그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더라. 
그리고 직접 아는 사이가 비록 아니더라도 사돈의 팔촌으로 이어져 그 사람의 도움이 나에게 닿을 수 있고 내가 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음을. 또 신분의 높고 낮음, 재물의 많고 적음을 떠나 서로가 긴밀한 네트워크 속에 도움을 주고 받는다면 나의 부담과 압박도 그만큼 줄어들 수 있음을 왜 난 깨닫지 못했나?
사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그들도 항상 중요한 순간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 그 도움 없인 절대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위험에 빠질 때면 누군가 짠하고 나타나서 생명이 은인이 되어주는 것. 현실에서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무엇보다 가슴 깊이 명심해야 할 것. 혼자 사는 세상은 없다는 사실!

꺽정이네 공동체가 성공할 수 있었던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달인들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활의 달인에 표창의 달인에 돌팔매의 달인, 장기의 달인, 서사의 달인도 있다. 이들은 어떻게 이것의 달인이 될 수 있었나? 무슨 목적이 있었나? 아니다. 그들은 놀면서 생활 속에서 길 위에서 그것들을 자연스레 익히고 즐겼을 뿐이다. 이것 참 공부로 스트레스 받는 수많은 학생과 부모와 선생님들에게 귀가 번쩍트일만한 정보가 아닌가? 달인 되기! 개그맨 김병만이 연상되는 것도 유쾌하고 좋다. 내가 이 분야에서 달인이 함 되어보리라. 그런 마음가짐으로 임한다면 적어도 한 가지는 잘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학교 교육은 그런 달인을 많이 만드는 쪽으로 힘을 쏟는다면 공부다 입시다 뭐다 해서 스트레스 받는 학생들도 없어질 텐데. 
일단 나한테 한 번 적용시켜 보자. 이 글 쓰는 거. 이거 왜 쓰고 있지? 나중에 입상하려고? 물론 그렇게 되면 더욱 좋겠지만 지금은 그냥 쓰자. 마음이 가는 데로 붓 가는 데로 함 신명나게 써보자. 글을 쓰면서 자유인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니.

20대 후반이 되니 이것저것 재는 것이 많아졌다. 생각도 많아지고 미래에 대한 염려도 가득하니 도무지 연애를 못 하겠다. 백수인 내가 어떻게 연애를 하나? 나중으로 미뤘던 연애사업일랑 꺽정이와 친구들은 참 쉽게 하더라. 몸으로 직접 들이대는 야생적인 연애 사업. 나도 20대 초반에 대놓고 들이대다 뺨 맞고 한강에서 눈물 질질 짜던 기억이 있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몇 대 무시당하고 얼굴에 손자국 몇 번 나도 위축될 건 전혀 없지 않은가? 갑자기 이 글을 읽으니 문자로 의향을 묻고 치고 빠지고 하는 젊은이들의 연애가 왜 이렇게 유치해 보이는지. 하긴 나도 별반 다를 것 없다. 꺽정이네처럼 할 수 있으리라고 말할 수도 없다. 좀 더 내공이 필요하겠지. 무식한 몸싸움이 아니라 무작정 들이밀기가 아니라 쿵푸를 할 수 있는 내공이...

‘스승을 만나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라’ 라는 말이 참 인상적이다. 진정한 스승을 만나기도 그 스승과 지속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기도 참 어려운 현실이 아닌가?
“건강하시죠? 취직하면 찾아뵙겠습니다.”
“그런 소리 마라.”
선생님의 그 말 뜻을 그렇게도 이해 못했으니 이런 쯧쯧... 스승이라 한다면 스승으로 모신다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한 말씀 좀 해 주십사, 좋은 방향을 제시해 주십사 청할 수 있는 베짱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친구도 마찬가지다. 단지 밤늦게 만나 술 한잔 함께 기울인다고 해서 그게 진짜 우정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나부터도 속시원하게 친구에게 내 치부를 드러낸 적이 있나? 그래도 난 남의 이야기는 잘 들어주지. 지금껏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였던 것 같다.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는 법. 자신의 속내는 꾹꾹 숨긴 채 귀만 갖다 대는 친구에게 무얼 더 얘기하고 싶겠어? 
그렇담 우정? 의리? 그런게 나한테도 아직 남아 있나? 내 앞가림에 급급해서 살고 있지. 우정과 의리 따윈 더 이상 내 상관도 아니라는 듯이... 많이 부끄럽구만. 부끄러워.
‘사람이 어둠 속에 살고 있으면서, 그 속에서 친구를 얻는다면, 어둠 또한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 구절이 마음에 와 닿으면서도 왜 자꾸 날 부끄럽게 만드는지...

붓가는데로 마음가는데로 그냥 쓰다보니 산만하고 두서 없는 글이 된 것 같다. 왠지 일상이 축제요, 축제가 일상인 꺽정이네 사람들에게 내가 동화된 듯. 흐느적거리면서도 때론 꿋꿋하게, 웃고 떠들고 즐기면서도 때론 눈을 반짝거리며 진지해질 수 있는.
내 이웃에게 친구에게 가족에게 스승에게 내 자신을 더 이상 감추지 않는 자유. 그런 자유인이 되어 시원스런 들판을 훨훨 뛰어다니는 날 상상해본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진정한 가치를 잊지 않는다면. 세속에 물든 보우가 되지 않고 부귀공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던 갖바치 병해대사처럼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나 혼자만의 자유가 아닌 이 세상을 가치있게 만드는 진정한 자유인의 길이리라.
지금 이 순간이 그 길의 작은 발걸음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위한 이 한 발의 내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