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이 갖는 감각구조 보다 더 많은 구조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아마 김훈 작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흘려버리는 순간들을 어떻게 이렇게 잘 잡아내어 의미를 부여하고 그 세밀한 감감들을 표현해내는지 신기하다.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목이 메어온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니.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세뇌 속에서 기계처럼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과감하게 '밥벌이의 지겨움'이라고 말해주니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 나는 근로를 신성하다고 우겨대면서 자꾸만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라고 몰아대는 이 근로감독관들의 세계를 증오한다. 나는 이른바 3D업종으로부터 스스로 도망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인간들의 저 현명한 자기방어를 사랑한다. (밥벌이의 지겨움) -

 

이 대목을 읽으며 내가 지금 직장 때려치고 (사실 때려친 건 아니라 계약 만료지만) 나서는 것을 정당화하려 한다. 3D업종은 아니지만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곳도 아니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테니까.

 

이 책 중에 가장 공감했던 것은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이란 글이었다. 악기와 음악에 대한 단상이 너무나 와닿는다. 연장에 애한 예찬도 마찬가지였고..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그는 선율과 박자 위에, 지금까지 없었던 세계를 빚어낸다. 그가 빚어내는 세계는 연약하고 정처없는 것이어서, 음들은 태어나는 순간에 시간 속에서 소멸한다. 하나의 음이 소멸하고 또 다른 음이 물고 이어지면서 다시 소멸한다.

.... 악기는 인간의 몸의 일부로써만 작동한다. 인간의 몸이 아니면, 그 악기로부터 소리를 끌어낼 수가 없다. 타악기는 팔의 일부이고 관악기는 호흡의 일부이며 건반악기, 현악기가 다 몸의 일부이고 성악은 몸 그 차체이다. 그래서 모든 악기는 인간의 몸과 친숙하게 사귈 수 있는 물리적 구조로 태어난다.

가야금, 거문고, 기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하프 같은 현악기들은 인간의 몸에 안기기 편안한 구조를 갖고 있다. 연주자는 악기를 안거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켠다. 그 악기의 구조는 여성성을 연상시킨다. 악기는 기계가 아니라 몸 그 자체인 것이다.

...악기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구멍과 줄과 떨림판과 건반 어디에도 소리의 흔적은 없다. 악기는 소리의 집이지만, 소리는 그 집에서 살지 않는다. 소리는 어지에 있느냐. 소리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죽느냐. 나는 소리의 거처를 알지 못한다. 그 거처를 알지 못하지만, 소리는 악기와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 사이에서 아날로그 바식으로 태어나고 죽난다. 문질러야 소리가 나오고 불어야 소리가 나오고, 손가락을 눌려서 바람구멍을 막고 열어야 소리는 춤을 춘다. 소리의 춤은 아날로그의 춤이다.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그런데 노는 거, 그게 말이 쉽지 해보면 어렵다. 놀면서 돈 쓰고 돌아다니는 거는 노는 게 아니라 노동의 연장이다. 돈에 의지하지 않으면 못 노는 거는 돈 버는 노동세계와 연결돼 있어서 노는 게 아니다. 노는 거는 그 자리에 있는 세상하고 단둘이 노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