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뭐로 할까 한참 끄적거리다가, 특별히 지을 필요가 있나 싶어 그만두었다.

소설 제목에 주제가 너무도 명징하게 들어있는 것 같아서.

<허삼관 매혈기>로 더욱 많이 알려진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 <인생>이다.

제목 그대로 주인공 푸구이의 삶을 통해 바라본 '인간의 지난한 일생'이 소설에 그대로 담겼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가진 것들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을 쉽게 소비해버리고 탕진해버린다. 그리고 그 가치를 깨달을 즈음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가는 모래들 처럼 모든 것이 이미 자신의 곁을 떠나가 버린다. 주인공 푸구이는 그렇게, 수대에 걸쳐 쌓아왔던 집안의 재산들과 소중한 아버지를 한 순간에 잃는다. 그간 부유한 지주로 군림하던 가문의 지위도 사라지고, 그의 가족은 땅 한마지기도 남지 않은 가난한 소작농의 신세로 전락한다.

 

그리고 인생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과 비극을 푸구이에게 계속 해서 선사한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과 아직 열다섯도 되지 않은 어린 막내 아들의 죽음. 그리고 어린 딸의 죽음. 아내의 죽음, 그리고 손자의 죽음과 자식같던 사위의 죽음까지..

 

열거하다보니 정말 죽음의 쓰나미다.-_-;

푸구이는 긴 인생 안에서 소중하게 생각한 사람들을 모두 먼저 떠나보낸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조금씩은 초연해진다. 자식을 먼저보내는 고통을 겪고 나서도 "그래도 자신이 떠난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돼서 다행"이라는 성숙한 단계로 까지 나아간다.

 

젊은 시절까지는 어리석었고 자신이 지닌 많은 것들의 가치를 알지 못해 떠나보낸 '실수들의 집합'이 인생의 복잡한 결을 형성했다면, 중년과 노년의 삶은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들이 삶을 주조했다. 그리고 더 이상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그는 인생에 초연해진다. 아내의 충격을 걱정해 아들의 죽음을 알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그는 이후 딸의 죽음을 대할 때는 '고통을 정면에서 아내와 함께 대면'하게 된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집안의 재산을 모두 날려버렸다며 자기 비난에만 빠졌던 그는, 한순간에 재산을 모두 잃어버림으로써 악덕한 '대지주'로 낙인찍혀 사살당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자신의 운명에 감사할 줄아는 사람으로 변모해간다.

 

위화는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잃은 푸구이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늙은 소를 친구 삼으며 가늘고 질긴 인생을 유머로 이어나간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비웃고 어떻게 놀리든 그는 그의 삶을 묵묵히 이어나갈 뿐이다.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수없이 소용돌이 쳤던 자신의 인생을 초연하게 돌아보며, 그리고 그 하루 하루들을 어제처럼 생생히 기억하며 여전히 현재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간다.

 

운명에 초연한 삶. '삶'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 누군가는 너무 수동적인 삶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인생> 속 인물들은 자신의 재산을 몰수하고 경작지를 공유하며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식사를 제공하고 삶을 획일화하는 사회 체제에 저항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진짜 원인 '사회'에 대한 저항에까지 나가진 않는다.

 

이에 대한 대답은 서문에 있는 것이 아닐까. 위화는 작가는 글로써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라고 했다. 그리고 그 초연함이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외부적인 것들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 않는 태도가 아닐까. 삶이 선사하는 고통과 행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그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지속적으로 노래하는 삶이 '인생'이라는 것. 

 

책을 읽는 내내 푸구이와 함께 울고 함께 웃었다.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본 것 마냥 마음에 묵직한 무언가가 남는 느낌이었다. 케인즈는 말했다. "모든 사람은 장기적으로 죽게 되어있다"고. 죽음은 인간의 운명이다. 그리고 유한한 운명을 알고도 눈 앞의 생애를 포기할 수 없어, 더 아름답게 만들고자 아등바등 노력하는 사람의 존재가 인생을 더 가치있고 귀중한 것으로 만든다. 고통 속에서도 미소와 여유로 삶을 긍정하는 푸구이의 삶이 위화가 그린 인생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 그 자체가 우리 모두가 절망의 끝에서도 생을 놓지 않아야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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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그날부터 나는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저녁이 되면 자전에게 성안에 가서 유칭이 좀 나아졌는지 보고 오겠다고 했지. 그러고는 천천히 성 쪽으로 걸어가다가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발길을 돌려 유칭의 무덤 앞에 가서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다네. 밤이 깊어져 바람이 얼굴 위로 불어오면 죽은 아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지.

 

사람은 즐겁게 살 수만 있다면 가난도 두렵지 않은 법이라 했지

 

푸구이 노인처럼 잊히지 않는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자기가 살아온 날들을 그처럼 또렷하게, 또 그처럼 멋들어지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말고는 또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가 젊었을 때 살았던 방식뿐만 아니라 어떻게 늙어가는지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푸구이 노인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기 좋아했고, 자기 이야기 하는 걸 좋아했다. 마치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한 번, 또 한 번 그 삶을 다시 살아보는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는 새의 발톱이 나뭇가지를 꽉 움켜잡듯 나를 단단히 사로잡았다.

 

루쉰 "막다른 길에서는 갈림길에서처럼 성큼 걸어갈 것이고, 가시밭길이 가로막는다 해도 여전히 걸어갈 것이다. 다만 온통 가시밭뿐이어서 결코 갈 수 없는 길을 분명 한 번도 맞닥뜨려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본래 막다른 궁지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다행히도 아직 그런 지경에 이르지 않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