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아이가 독서 편식이 심합니다. 몇 해전부터 보기 시작한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아직까지 보고 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 그 책을 지금까지 보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몇 년 동안을 번갈아가면서 볼 정도로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런 아이에게 이런 글밥이 있는 청소년 성장 소설을 읽히고 싶은 엄마의 마음으로 책을 구입해 아이 방에 그것도 눈에 잘 띄게 놓아두었습니다. 몇 번 눈치를 주고, 언지를 주면 보는 것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보는 척하는 것같은 의심이 앙금처럼 깔려있다 휘저을 때면 떠오르곤 했습니다.

몇 일이 지나고 아이가 미로의 설계도를 보여줍니다. 설계도를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꽤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듯 보였습니다. 이런 저런 설명을 합니다. 오른쪽을 봐. 왼쪽을 봐. 위쪽을 봐. 그렇게 보다 보면 위쪽에 거울이 있고, 거기에 '바보의 얼굴'이란 글자가 보인다구요. 그리고 미로를 보면서 자못 목소리 톤도 커지고, 미로를 꾸며놓은 장애물들이 마치 자기가 해놓은 것마냥 약간은 들떠서 설명을 합니다. 아이들이 왜 이런 미로를 만들었냐고 묻자, 말주변 없는 우리 아들, 페이지를 찾기 시작합니다. 교장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만들었다는 부분을 펼쳐 보입니다. 재밌냐? 물으니 재미있다길래 그래, 엄마도 보마 약속을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종업식날, 시노는 가족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아들 에이지가 집에 오지 않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여기 저기 수소문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에이지의 반 남자 아이들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납치라도 당한 걸까요?

아이들은 미리 계획을 했습니다. 버려진 공장에 자기들만의 '해방구'를 만들고, 거기에서 일주일을 지낼 계획을요.

기가 막힙니다. 어떻게 부모들의 마음을 이렇게 모를 수가 있죠? 아무리 철이 없어도 말입니다. 읽다가 2년 전 일이 떠오릅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6학년때입니다. 아이가 말없이 외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의 심정이란, 정말 피를 말린다는 말이 딱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친구네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자주 가는 친구네 전화를 했습니다. 아이가 오지 않았다는 대답만이 돌아왔고, 오면 연락해 달라는 부탁만 하고, 전화를 몇 차례했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밤이 그렇게 길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가출한 걸까? 그럴 아이가 아닌데.... 분명 친구네서 잤을거야. 그러면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별의 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들었고, 아이는 이튿 날, 점심 무렵 들어왔습니다. 친구네서 자고 온 것입니다. 그 친구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구요. 그 때의 기억에 아이들의 행동이 더욱 괘씸합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이 걱정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 날, 방송을 통해 아이들은 자신들은 해방구에 잘 있고, 우연찮게 종업식날, 납치를 당한 사람은 '나오키' 뿐이라고 전합니다.

아이들의 말과 행동이 도무지 마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편한 속내를 억지로 누르고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의 편으로 마음이 기우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어른들의 군상이 정말 가관입니다.

선도라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체육교사와 이런 사람을 고용한 교장, 그렇게 해서 얻게 된 '모범 학교'라는 타이틀. 폭력을 묵인해 버린 교사와 학부모회. '낙태' 장사를 해서 애인한테 돈을 쓰는 아빠. 부패한 시장과 담합하는 건축과장, 교육감, 그리고 경찰서장에 교장과 학부모회 회장까지.

"정직하게만 살면 먹고 살기 힘들어. 세상이 다 그런거야." (p272)

이런 부패하고, 잘못된 사고에 사로잡힌 어른들에 맞서는 아이들의 말과 행동은 한마디로 거침이 없습니다. 모든 일이 아이들이 계획한대로, 어른들은 아이들의 계획속에 일부분일 뿐입니다. 나오키를 유괴범에게서 구출하는 것도, 교장과 생활 지도 주임을 미로 속으로 끌어들여 골탕 먹이는 것도, 체육 교사 사카이를 혼내주는 일도 모두 계획대로 척척 들어맞고 이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통쾌하게 만듭니다. 어른들은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합니다.

너무나 신나고 유쾌합니다. 큰 소리로 웃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색한 헛웃음입니다. 난 이 책을 읽으며 시작부터 기성세대였습니다. 아이들이 아무 말 없이 집에 안 들어왔을 때는 유괴된 건 아닌지 함께 걱정했고, 앞 뒤 가리지 않고 노는 아이들한테 불안 불안, 걱정과 잔소리를 퍼부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구'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가며 어른들에게 맞서는 아이들이 괘씸하기만 합니다. 이유가 어쨌든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아이와 함께 성장소설을 읽고픈 이유는 아이와 나 사이에 서로 벌어져 있는 간격의 골을 조금이나마 줄이려는 노력에 있습니다. 나도 까막득하지만 규칙과 규율, 공부만을 강요하는 생활에서 일탈을 꿈꿨습니다. 소심해서 꿈만 꾸다 말았지만요. 내가 당시 이 책을 읽었다면 미워하는 누군가를 미로속에 가둬 혼내주는 상상을 했을지 모릅니다. 아니요. 더한 장치를 추가해서 더 심하게 혼내줬을 지도 모릅니다. 그게 누구였을까? 아마 몇 몇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내가 옛날로 돌아가 아이 또래의 내가 되니 금새 아이의 입장이 이해가 됩니다. 그 당시, 이 책의 '해방구'가 간절했으니까요.

"너희들, 여기서 뭘 할 셈이냐?"

"우리들의 해방구를 만들려고요."

"해방구?"

"어른한테 방해받지 않는 아이들만의 성이에요."

"어른들이 그런 걸 허락할 리 없을텐데. 쓸데없는 짓 하지마라."

"허락하지 않으면 싸우면 돼요."

"싸운다고...? 이길 것 같으냐?"

"질 거라고 생각하고 싸우는 사람은 없어요." (p59)

어른들은 그럽니다. 어른들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그건 쓸데없는 짓이라고. 저도 그런 소릴 들었으면서 커서 아이한테 또 이런 소릴 합니다. 이런 것도 학습이 되는 걸까요?

이 책은 십대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어른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결하고, 벌을 주니까요.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좀 부끄럽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골탕먹이며 해방구에서 7일간의 전쟁을 치뤘습니다. 그리고 계획대로 해산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일주일의 사건과 해산으로 갈무리 됩니다. 하지만 난 끝을 끝으로 안 보고, 그 뒷 일을 앞서 걱정합니다. '아이들이 괜찮을까?' 이래서 기성세대란 소릴 듣나 봅니다. 내가 이미 거쳐온 과정이니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만 보며, 아이와의 관계에만 집중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