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감진마을에서 업둥이로 자란 열여덟 살 소녀가 친엄마를 찾아나서는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그렸다.

그런데 그 친엄마로 의심되는 사람의 정체가 심상찮다.

근처 시골마을에 장마다 떠돌아다니는 꽃년이란다.

아래위 꽃분홍색으로 칠갑하고 머리에 꽃꽂고 돌아다니는, 당신이 상상하는 바로 그 ...!

설마...!

나 같으면 차라리 나이 많은 촌 할매, 지금의 양엄마를 그냥 엄마려니 하며 살고 싶겠다.

미친 아줌마가 내 친엄마라니...?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고 떨쳐버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야기 속 박진아는 진실을 파헤치고자 한다. 끝까지.

과정 중 진아에겐 첫사랑, (현실인 듯 현실아닌) 눈알미남 신우도 등장하고

("괜찮아 사랑이야"라는 드라마에서 아이돌 그룹 엑소의 "디오"가 열연했던 역할이 딱 떠올랐다...눈알 미남이라는 공통점까지...!

요즘 드라마에서나 소설에서나 스키조 현상이 자주 소재로 사용되는 것 같다.),

90년대 (1993년 부터 2002년 까지 방영되었다고 한다. 재밌게 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미드,

엑스파일의 매니아 멀더리안 인애라는 절친도 등장하고,

진아보다 중증으로 보이는 캐롤 변태 물리 선생님도 등장한다.

어딘가 조금씩 모자라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의 약점을 즉각적으로 지탄하지 않고 신중하게 보듬어 가는 미덕을 보이며

​서로를 의지하며 의기투합하여 사건을 해결해 나가고

얼크러졌던 것들을 바로 잡아 보려고 애쓴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물리 선생님의 행동을 소명하려고 나서는 진아의 용기는 사뭇 장엄하다.

뭐든 좋게 좋게 덮어버리려는 감진마을 할매 할배들,

인애의 성추행 미수사건을 덮으려 했던 경찰과는 정확히 상반된다.

<완득이> 못지않은 재치와 재미로 포장되어 있지만 퉁 퉁 가슴을 치는 묵직한 주제들이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 이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작가들의 가슴앓이가 하나 둘씩 세상으로 토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자기전 잠깐 책을 읽자 했다가 새벽 세 시까지, 이야기가 끝날때까지 읽었다. (그만큼 흡인력이 있다는...!)

책을 덮자,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사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하는 질문의 파문이 마음에 그려지다... 새겨졌다.

* 책속 밑줄

머릿속이 드끈해지면서 아무나 붙잡고 예전 그 촌놈과 이 남신 사이의 괴리에 대해 설명 좀 해 달라고 떼를 쓰고 싶었다.p.25

심장이 쿵 했다.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내 의중을 간파당해서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녀석이 톡 하고 웃어 버렸기 때문이다.

잘생긴 것들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 웃어야 한다. 안그러면 애꿎게 마주 선 사람의 심장에 심각한 통증을 유발하는 수가 있다. p.27

열여덟 살 먹도록 감진 마을 사람으로 살다보니 내게도 눈치란 게 생겼다.

이 마을의 상식에 도전이 될 만한 말은 삼키는 게 좋다.

전 장군이 법정에 섰던 일이나 이십구만 원밖에 없다고 증언한 일 따위를 알은척해서는 안 된다.

내 기억이 시작된 이래 감진 마을의 상식은 한 차례도 업그레이드 된 적이 없고, 순천댁 할머니의 육자배기는 한 번도 끝까지

불린 적이 없다.

엄마는 국산 고사리와 중국산 고사리를 구분할 줄 알고, 베트남 물고기와 일본 물고기도 척척 알아 맞히지만 결정적으로 비유에 약하다.

해가 갈수록 그 증상이 심해져서 엄마에게 말할 때는 한 방에 알아듣게 말해야 한다. p.32

"야, 그래도 그렇지. 물리보담은 우리 동네 노인들이 낫겠다"

"지랄한다. 싫든 좋든 물리는 과학 전공자다. 정 물리가 껄그럽다면 그래, 고마 이리 생각해라. MSG!

유해하다 무해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첨가물 말이다. 유해한지 무해한지 결론은 안 났어도 MSG는 결국엔 제 몫을 해냈다.

그게 들어가야 라면 국물맛이 제대로 나니까.

그란께 우린 지금 인간계의 MSG를 만내러 가는 길이다 생각하고, 그 우거지 죽상 좀 풀어라."

캐롤 변태 물리에게서 과학자라는 속성을 뽑아내고 MSG라는 비유까지 든 인애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허셋덩어리 멀더리안이 아니라

진짜 엑스파일의 멀더 같았다.P.96~97

어른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들을 다시 해작이는 걸 싫어한다.

서해 바다에서 우리와 동갑내기 친구들을 태운 배가 가라앉았을 때도 그랬다.

p.120

"샘은 와 선생님이 됐십니꺼? 혼자 조용히 작업하는 예술가가 됐으면 딱 좋았을 긴데.

전부터 느낀 긴데요, 선생님은 우리 가르치는 게 억수로 피곤해 보입니더."

"맞나? 뭐, 우짤 수 없다 아이가. 그래도 내는 선생 된 거 후회 안한다.

캐롤을 만났으니까. 내가 캐롤을 처음 본 게 학교에서였거등.

수업시간에 웬 놈이 내 설명은 안 듣고 뭣을 끼적끼적 그리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빼앗았드만 그기 캐롤이라.

첨에는 캐롤이라는 이름도 몰랐던 기다. 압수한 그림을 교탁에 놓고 수업을 하는데,

그 그림 속 소녀가 말을 걸더라."

"무신 말을예?"

물리는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오빠, 오빠, 오빠, 나 좀 봐 주라."

나중에 내가 미쳐서 싸돌아다니더라도 물리만은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p.134

물리는 즉각적인 논평을 보류했다.

자기 머리가 내리는 결론과 자기 가슴이 내린 결론이 다르다고만 했다. p.134

"...니, 멀더가 엑스파일 아홉 시즌 동안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살아남은 비법이 뭔지 아나?"

"뭔데?"

"사건 하나 해결하고 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기다. 사실 해결도 아니었지. 곡 미스터리하고 알쏭달쏭하게 에피소드가 막을 내렸으니까. 하지만 멀더는 그거에 연연해 안하고 다음 사건으로 넘어갔다. 그라니까 니도 이제 정신채리라. 그래야 다음 일을 기약할 수 있다.

그 말은 다시 세월의 물살에 휩쓸리라는 뜻이다. 까짓것 마음만 먹으면 다시 예전처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고래가 지구 한 바퀴를 돌 시간을 의자에서 뭉개고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수업 시간엔 최선을 다해 다리를 떨며 디저트로 컵라면을 챙겨 먹고, 진주 남자애들 유혹할 치명적인 반바지를 고르러 다니던 박진아로 돌아갈 수도 있을 터다.

눈 딱 감고 거친 물살로 뛰어들기만 하면 된다. 풍덩! p.156~157

"샘! 인간은 와 삽니꺼?"

...

"와? 제 2의 사춘기가 급습하드나? 이 오밤중에?"

"그기 아니라, 샘이 그랬잖십니꺼? 맨 나중에는 다 멀어지게 돼 있다고. 인간들도 서로 멀어지고 쬐매난 원자들까지 멀어져서 텅 빈 우주만 남는다고. 끝이 그리 허무한데 우린 뭐할라고 아등바등 살아가느냐 그 말입니더. 서로 안부는 뭐할라고 물어 쌌느냐 말입니더."

"아이고야, 니도 참 할 일도 없는갑다. 몇 백억 년 후의 일까지 끌어다 걱정하니라고 고생이 많네. 우주가 우찌 종말을 맞게 될지는 몰라도 니는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어차피 오십억년 정도 지나믄 태양이 팽창해 가 지구는 깡그리 증발하고 없을기다. 그란데 몇 백억 년 후의 일을 뭐할라 걱정하는데? 니, 방학과제들은 다 했나?"

방학 과제라는 말이 어머어마한 각성 효과를 발휘했다. 방학 과제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 아니라 내게 뭔가 할 일이 있다는 새삼스러운 자각이 구질구질하던 기분을 날려 주었다.p.178

작년에 친구를 따라 성당에 갔을 때 '말씀이 육화되었다.'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골자는 신의 말이 예수라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거였는데, 그 어려운 얘기를 내가 한방에 알아들었다는 사실에 우쭐하여 정작 얘기 자체의 종교적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말씀은 육화된다. '뭣이야, 내 아를 낳아도!' 따위의 한낱 문장에 지나지 않았던 프러포즈도 결혼과 임신,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한동안 잊고 있던 신학적 담론을 이 시국에 떠올린 건 인애를 둘러싼 소문이 실체화되는 걸 지켜봤기 때문이다.

고삐 풀린 말이 경찰서를 박차고 나가 우리 학교를 휘돌았고, 아이들의 가정을 돌고 돌아 마침내 학부모의 투서가 되어 날아왔다.

투서의 내용을 알아내 다시 학교에 퍼뜨린 '중간책' 또한 놀라웠다. p.207

그는 캐롤의 남자이기 이전에, 제자들에게 쌍쌍바를 돌릴 수 있을 만한 마음새와 경제력을 지닌 어른이다.

나와 인애도 무사히 자라서 물리처럼 어른의 세계에 안착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쌍쌍바를 사 줄 만큼 돈을 버는 따뜻한 어른.

p.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