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중반쯤 읽었을때였을까요? 

뒷 표지 안쪽에 동 작가의 다른 책 <하와> 속의 짧은 글이 소개 되어 있었어요.

그걸 읽고 잠시 뒤 따뜻한 물에 손을 씻는데

(그때가 3월이었으니 따뜻한 물이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 아직 쌀쌀할 때였거든요.)

그런데 그 순간 마치 진흙으로 만들어진 내 손이 녹아 내릴 것만 같은 실감!!!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으로 쓰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기도 했죠.)

다소 자극적인 부분을 발췌한 낚시성 홍보글로 보아 넘길 수도 있는 글이었는데 

(물론 낚인데 대해 후회는 안할만큼 좋은 책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강렬한 실감을 불러일으켰을까요?

아마도 데몬의 전반부가 죽 그 무드를 조성해 온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인공 이름도 클레이래요...오물 조물 아이들이 주무르며 가지고 노는 그 클레이랑 동음이란 말이지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클레이를 찾아온 의뢰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부터 책은 시작됩니다. 

얼마전 이혼한 데다가 산더미 처럼 쌓여있는 원고들을 분류하고 처리해야 하고,  

제대로 된 기획서 하나 제출하지 못해 전전 긍긍하며 살아가고 있는, 작가 지망생이기도 한 클레이에게  

제시하는 솔깃한 제안.  

이야기를 들려 줄테니 그걸 책으로 내라는 것이었죠. 

의뢰자는...

타락한, 어둠의 영.

악마.                                                         p.15

 

악마, 루션의 눈을 통해 본 천지 창조의 장면.

진흙이 일어서고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걸어다니는 신비.

그 보잘 것 없는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길.

그에 비하면 타락한 천사, 루시퍼의 외양을 얼마나 아름다운 빛으로 묘사하는지...

  

타락한 천사의 목격담이 기독교를 훌륭하게 변증해주고 있군요. 

책을 덮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런데 루션은 왜 그랬을까?

루시퍼에 대한 반란? 하극상? 독자 노선을 걸어보겠다는 것?

주체할 수 없는 신경증의 폭발?

미움과 악을 쏟아놓기 위해서?

자신들에게는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인간들에게는 자신을 주어 대속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질투심?

인간만 애지중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자기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하소연이라도 해서 속풀이를 하려고?

아니면 회심이라도 하려는건가?

악마를 이해해 보려고 하니 꿈자리가 시끄러워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다 정답을 찾아냈어요.

여기 책 속에서 루션이 대답해 주고 있군요. 눈을 부릅뜨고 흥분하면서...

 

"하지만 내 이야기는 끝났어......

내 이야기는 너의 이야기에 밀려났어. 그게 안보여?

아직도 눈이 멀었어, 이 멍청한 인간아?

내가 줄곧 말했잖아. 이건 언제나 너에 대한 이야기였어......    p.393

 

진실이야, 클레이! 결국, 난 너에게 진실을 말해줬어. 내 말까지 들었으니 이제 넌 두 배로 책임이 있어.  

그래, 네가 만약 그들 중 하나, 그 빛나는 영혼들 중 하나가 된다면 내가 그것에 대해 뭘 어쩔 수 있겠어? 

하지만 진실을 거부해. 결정하길 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그러면 네게 합당한 결과를 거두게 될거야......"  p.395

 

나는 그동안 루션의 이야기의 소용돌이 바깥에 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 흐름의 한복판에 딱 걸려들어 있었다.

교전 중인 두 군대 사이에. p.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