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마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혹은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상상만으로도 그 풍경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이 그런 경우이다. 우리 글로 쓰여진 책을 읽는 다는 것. 번역자라는 또 한사람의 개입자가 없이 그 느낌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김주영의 이번 작품은 우리 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평상시 우리가 쓰는 글로 얼마나 아름다운 말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 역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림을 보는 듯한 때로는 직접 들리는 듯한 그의 글들은 한 문장 한 문장이 무척 소중하다.

 

칠 십이 훌쩍 넘은 노작가의 엄마 이야기. '잘가요 엄마'라는 제목부터가 감성을 자극한다. 어머니가 아닌 엄마다. 신경숙의 작품 '엄마를 부탁해'를 연상할 수 도 있다. 그 작품에서도 역시 어머니가 아닌 엄마 였다. 어머니와 엄마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우리들 가슴속에 자리잡은 영원한 인물은 아마도 '엄마'가 아닐까? 노작가의 엄마 이야기는 어떨까? 잔득 긴장을 하고, 어쩌면 펑펑 울 준비를 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작가는 독자에게 눈물흘릴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다. 구십이 넘은 엄마의 죽음을 지극히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건조할 정도이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너무도 많이 울어버려서 더이상 흘릴 눈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내뱉는 말들과 행동들은 너무도 건조해서 버석거릴 정도이다. 그의 모습에서는 조금의 물기도 발견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엄마가 증오의 대상은 아니다. 엄마는 항상 그 자리에 변치 않고 있어야할 의무적 존재이다. 그 당시에는 의식하기 힘들지는 몰라도, 존재의 부재는 후회를 만들고 만다.

 

김주영 작품에서 엄마는 무척이나 억척스러운 인물로 등장하곤 한다. 가난에 찌든 삶을 혼자서 묵묵히 버텨나가는 여장부이지만 본인의 속 내는 여간해서는 잘 들어내지 않는 전형적인 우리네 엄마의 모습이다. 김원일의 작품에 등장하는 엄마의 모습과 비슷하다. 아마도, 전쟁을 전,후로한 고난의 시대를 살아온 모든 엄마들의 모습이 다 그러할 것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인듯한 이 책에서 엄마와 주인공과의 관계는 흔한 모자의 관계는 아니다. 서로의 삶을 부정하는 듯한 무관심. 하지만, 끊이지 않는 끈끈한 애정의 핏줄. 애증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모자의 관계는 부자연스럽다. 단지, 남들과 다른 불운한 가정사 때문은 아닐 것이다.아버지가 둘이라는 이유. 자신과 성이 다른 형제가 있다는 이유. 분명히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불행은 아니다. 작가는 한 가정의 불운한 가정사를 그저 담담히 읊조리고 있을 뿐이다. 마치 남 이야기 하듯이.

 

엄마의 죽음과 함께 시작하는 이 책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감정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의 가장 좋은 점 중의 하나가, 지극히 신파적이거나 , 통속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를 너무도 담담하게 펼쳐가고 있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하나 씩 벗겨지는 출생의 비밀들도 충격적이지 않고, 진부하지 않다. 그저,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담담한 느낌. 그런 담담함 속에 숨어있는 촉촉한 물끼를 느낄 수 있다. 마지막에서야 크게 한 번 흐니끼고 마는 주인공 처럼. 우리는 책을 읽는 의식하지 못하는 촉촉함을 맛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책장을 덮고 나서야 비로서 촉촉히 젖어 있는 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욱한 안갯속을 오랫동안 걷고 난 후의 모습처럼 말이다.

 

엄마는 모든 문장가들의 영원한 화두이다.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 사랑스럽고 고맙고 미안한 존재. 언젠가는 떠나 보내야할 존재, 하지만 쉽게 놓을 수 없는 존재. 아마도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불안감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엄마라는 든든한 손을 꼭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젠 엄마의 손을 놓아드려야 한다. 그리고, 나즈막히 읊조려야 한다. '잘가요, 엄마!'

 

쥐똥나무 울타리에서 들리는 참새들이 파닥이는 소리, 행주로 훔쳐낸 듯 말끔하게 벗겨지던 여명의 하늘, 그런가 하면 초저녁의 잿빛으로 죽어가는 듯한 우중충한 하늘, 진한 자줏빛으로 물들어가던 동녘 하늘, 별이 총총한 밤하늘, 밤 숲속에 얼기설기 비껴 있는 달그림자, 오솔길 뒤에서 피어올라 들판 멀리로 가만가만 피어오르는 밤안개, 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담벼락에 그리는 기하학적이고 괴기한 그림자,멀리서 개 짖는 소리, 그리고 바람에 떠밀린 판자 울타리들의 삐걱거리는 소리들, 밤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들의 울음소리, 그 바람을 타고 흐르는 밤의 꽃냄새들, 돌담 아래로 떠밀려가는 낙엽들의 건조한 목소리, 가로수 가지 위에 걸터앉아 흔들리고 있는 조각달, 밤빛 속으로 꼬리를 늘어뜨리며 희미하게 그려지는 밭둑길,그 밭둑길을 따라 피어 있는 하얀 메밀꽃들, 젖먹이 울음소리 같아 들려올 적마다 소름끼치는 도둑괭이의 울음소리,하늘 끝자락을 따라 우쭐거리며 춤을 추는 듯한 산주름,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는 숨쉬거나 말하고 있는 듯한 밤의 영혼들이었다  / 본문 2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