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아트리스와 버질'이란 책이 기대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책의 주제가 '홀로코스트'를 다루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유태인들을 학살한 역사적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는 책의 설명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전작 '파이 이야기'에서 시도한 것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당나귀와 원숭이라는 동물의 방황을 통해 홀로코스트를 조명하는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책을 읽어보니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파이 이야기'처럼 유사한 면도 없지 않지만, 홀로코스트라는 무거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던 작가 자신의 고뇌가 담겨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얀 마텔의 소설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이지만, 작가의 자전적 체험이나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구성된 사실주의적 작품들과 성격이 다른 소설이다. 작가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다뤄야 그 사실을 독자들이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고 그 고통에 공감할 수 있을까라는 고뇌는 얀 마텔에게 큰 고민거리였던 것 같다. 저자는 자신의 분신같은 주인공 헨리를 소설에 등장시켜 작가로서 글쓰기의 고민을 독자들에게 털어놓는다. 헨리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책들이 상상력이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픽션과 논픽션을 결합한 플립북 형식의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책을 뒤집으면 다른 성격의 작품을 볼 수 있는 형식으로 책을 구성해 파격을 추구하던 그는 '당신은 과연 무엇에 관해 쓰고 있는가'라고 묻는 출판사 관계자들의 지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헨리는 결국 글쓰기를 잠시 중단하고 아내와 함께 도시를 돌아다니며 그 상처를 잊으려 한다.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환경 속에서 즐거움을 맛보던 그는 어느 날 자신에게 보낸 의문의 희곡을 읽게 된다. 버질과 베아트리스라는 두 주인공이 '배(梨)'에 관해 이야기하는 희곡에 호기심을 갖게 된 헨리는 그 서류 봉투의 주소를 찾아간다. 헨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대하는 박제사를 통해 버질과 베아트리스가 그가 박제한 당나귀와 원숭이 캐릭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박제사 노인은 박제된 두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 몇 부분을 낭독한 후 그것에 관한 의견을 헨리에게 자문한다. 헨리는 불친절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박제사 노인의 황당한 요구에 불쾌해하지만, 희곡의 부분을 읽을 때마다 조금씩 드러나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 헨리는 박제사의 집을 찾아가 그와 함께 희곡을 완성해 간다.

헨리과 박제사와의 대화를 통해 완성되어 가는 희곡 '20세기의 셔츠'에 관한 글을 읽으면 마치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과연 두 주인공이 무엇을 위해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를 나누는가라는 호기심을 유발한다. 하지만 희곡 속에 담긴 글의 내용을 읽으면 홀로코스트에 관한 은유적인 표현들이 등장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버질의 모습, 두 주인공이 방황하는 영토 '셔츠'가 유태인들이 입은 줄무늬 셔츠를 연상시킨다는 점 등이 나치들로부터 핍박받는 유태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당나귀와 원숭이를 통해 그들이 핍박받는 모습을 읽다보면 그 동물의 고통에 이입하게 되는 묘한 효과를 주는 점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얀 마텔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 박제사 노인이 희곡에 집착하는 모습을 통해 동물에 대한 묘사에 집착한 나머지 역사적 원죄나 속죄같은 요소를 잊고 만 추악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작가는 독자들이 생각치 못한 충격적인 결말을 통해 희곡을 미완성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어쩌면 박제사의 모습은 형식에 집착해 '무엇에 관해 쓰고 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에 대해 답하지 못한 작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신 작가는 '구스타프를 위한 게임'이라는 다소 독특한 열다섯 가지 질문을 마지막에 남겨 놓음으로써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남겨 놓는다. 간단한 질문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 질문은 어찌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그 질문을 읽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식은 땀이 흐르는 날카로운 질문들이다. 유태인들이 겪었을 고난을 상징하는 질문들이 막상 나에게 닥쳐온다는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공백이 되어버리는 막막함을 유도함으로써 홀로코스트에 대한 간접적 체험을 제공하는 작가의 의도가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