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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작가의 작품 ’불놀이’를 읽었다. 처음에 이 소설을 접했을 때 최근작인 줄 알았는데, 82년도 작품을 재출간한 책이라고 한다. ’불놀이’는 각 네 편의 중편을 모아 하나의 줄거리를 형성하는 점이 특징인데, ’태백산맥’처럼 6.25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만 빨치산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강한 ’태백산맥’과 달리 ’불놀이’는 빨치산 활동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자식 세대들의 갈등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소설은 황복만이란 사장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고층빌딩에 앉아 자신이 이룩한 건축물 너머로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승리감을 맛보던 황복만은 어느 날 그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으면서 잊고 있던 자신의 정체를 떠올리게 된다. 아무런 감정없는 목소리로 자신이 신범호라고 말한 남자는 황복만 사장을 배점수란 이름을 부르며 그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왜 그는 의문의 전화를 받고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인간연습’은 배점수가 황복만으로 자신의 과거를 숨기게 된 사연을 서술함으로써 그의 숨겨진 어두운 과거를 드러낸다. 해방 이후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로 살아가던 황복만은 마을을 지배하는 신씨 가문의 부당한 억압 속에서 한을 품고 성장한다. 여동생 순월이를 성추행하는 신씨 가문 자식들을 폭행한 후 성질을 죽이고 살아가라는 아버지의 조언을 받은 황복만은 대장간 일을 배우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날 그를 찾아온 방 위원장의 교육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황복만은 6.25 이후 공산주의자가 되어 신씨 가문 일가를 풍비박산 내버린다. 자신을 억압하고 괴롭혀온 신씨 가문에 대해 평생토록 품고 있었던 한은 그를 살인귀로 만들어버린다. 그 이후 자신의 과거를 떨쳐버리기 위해 새로운 인간 황복만으로 30년간 살아오던 배점수는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소?’라고 묻는 의문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죄악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인간의 문’을 통해 작가는 배점수로부터 피해를 입은 신씨 가문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증오가 부른 비극의 실체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황복만 사장의 아들 형민은 그의 아버지처럼 의문의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의 정체를 폭로하는 의문의 전화를 받은 형민은 아버지 몰래 광주로 내려가 진실을 알게 된다. 6.25 와중에 가족들을 잃고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남은 노인을 통해 그 날 있었던 살육의 악순환을 생생히 전달한다. 지주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공산주의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는 피의 증오로 되풀이되어 돌아간다. 신씨 가문 사람들을 학살한 배점수가 북한군의 퇴각으로 산 속으로 숨어버리자 그의 아내를 나무에 매달아 구타하고 그 충격으로 그의 아들이 백치가 되어버린 과정은 증오가 남긴 상처를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아버지가 벌인 범죄의 실체를 알아버린 아들의 고뇌는 대를 이어져 내려오는 증오의 악순환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문’이 가해자의 자식의 입장을 통해 인간의 고뇌를 드러낸다면, ’인간의 계단’은 피해자의 자식이 어머니로부터 한의 정서를 물려받는 비극을 보여준다. 신병모의 아들 신찬규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아버지를 죽인 남자의 사진을 처음 목격하게 된다. 대장장이 배점수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임을 알게 된 신찬규는 자신의 인생이 어머니 대에 벌어진 비극과 무관하다고 생가하지만, 이모의 증언을 통해 어머니가 그토록 한을 품고 배점수를 증오하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소설은 신찬규의 어머니가 어째서 대장장이 배점수를 증오하게 되었는지 풀어감으로써 한 여인의 깊은 증오를 드러낸다. 남편을 죽인 것도 모잘라 여인의 몸을 더렵힌 원수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인은 복수의 감정을 품으며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인간의 문’과 ’인간의 계단’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의 주인공을 드러내는 중편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부모 시절 있었던 역사적 비극을 겪지 않았지만 그 증오와 한의 정서는 순환되어 그들에게 돌아왔다는 점이다. 남과 북이 갈라진 이후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대부분인 현재에도 서로에 대한 증오와 갈등이 계속되는 악순환처럼, 두 주인공 역시 그들의 부모가 겪었던 증오의 정서를 받아들이고 풀어가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중편 ’인간의 탑’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두 사람이 겪는 마음의 갈등을 잘 보여준다. 아버지의 악행을 알게 된 형민은 복합적인 심정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깊은 아들의 입장에서 협박범 찬규의 전화를 받고 싶지 않지만, 아버지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양심의 갈등을 겪는다. 반면 전화로 배점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찬규는 침착한 태도로 형민의 아버지의 목숨만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그 역시 형민에게만은 그 증오를 풀어내지 못한다. 자식 세대에서 벌어지는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갈등이 두 사람의 해후를 통해 봉합되지 못한 체 전화란 수단을 통해 서로 팽팽한 갈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휴전선을 두고 대치중인 현재의 대한민국을 연상시킨다.

두 사람의 팽팽한 갈등 속에서 당사자 배점수의 내면을 통한 심리 묘사를 통해 작가는 뒤늦게 참회하는 한 인간의 최후를 드러낸다. 식물 인간 상태에서 지옥같은 공간에서 과거의 영혼과 대면하며 공포감과 후회를 느끼는 배점수의 내면을 묘사한 장면은 조금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인 측면이 없지 않지만, 죽음의 순간 자신의 과오를 뒤늦게 해결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한 인간의 참회를 드러내는 점이 마음에 든다. 배점수의 죽음 이후 걸려온 전화를 통해 침묵을 유지한 형민과 찬규의 마지막 대화는 해결될 수 없는 증오의 악순환을 보여주는 듯 했다. 과거의 세대가 죽었지만 여전히 대화를 통해 풀어가지 못하고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마지막 모습이 더욱 쓸쓸하고 안타까워 보인다.

불놀이, 조정래,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