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을 읽게 된 계기는 이 책이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동명 영화의 원작이란 점 때문이었다. 또한 이 소설의 저자가 일본인이란 점도 흥미로웠다. 일본인이 쓴 영문 소설이 과연 어떤 느낌일까 호기심에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엔 여행기같은 구성 속에서 집사의 품위에 관하는 일인칭 화자의 이야기가 조금 지루한 면이 있었지만 중반부 이후로 조금씩 드러나는 인물의 과거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점점 자신의 지나간 나날에 대해 씁쓸한 고뇌를 하는 인물의 내면이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소설은 스티븐스라는 집사의 회고록같은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6일 간의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 그 동기부터 풀어가고 있다. 달링턴 홀의 새로운 주인인 페러데이 씨가 여행을 제안하자 스티븐스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주인의 배려를 받아들인다. 그가 여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바로 한 때 달링턴 홀의 총무였던 켄턴 양이 보낸 편지였다. 켄턴 양의 편지를 읽은 스티븐스는 인력이 부족한 달링턴 홀에서 일할 수 있는지 그녀에게 묻는다는 명목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남아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스는 자신의 동기를 비교적 합리적이고 타당한 근거를 들며 이 여행이 달링턴 홀의 운영에 있어 필요한 업무의 연장이라고 못박아둔다. 하지만 그는 유부녀가 된 후 20여 년만에 보낸 켄턴 양의 편지를 곱씹어보며 그녀에 대한 심리를 읽어내려고 한다. 달링턴 홀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고 삶의 공허함에 관해 이야기하는 켄턴 양의 편지를 읽은 스티븐스는 그녀의 결혼생활이 파국을 맞이했으며 그가 요청하면 달링턴 홀에 돌아올 수 있다고 해석한다. 이처럼 소설의 화자는 교묘할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켄턴 양의 복귀를 희망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의 화자가 말하는 ’위대한 집사’의 요건이란 점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이다. 그는 집사의 품위에 관해 논하면서 달링턴 경을 위해 일한 자신의 경력이 바로 위대한 집사의 요건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다. 위대한 포부를 가진 주인에게 봉사함으로써 인류에 이바지했다는 것이 바로 위대한 집사의 필요조건이라고 말하는 그의 믿음은 바로 달링턴 경을 위해 일한 자신의 경력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이 1차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 중 하나인 독일의 배상금 문제에 대한 회의를 열던 과거를 회상한다. 연합국의 조약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 달링턴 경은 동맹국의 대표들을 모아 독일에 대해 보다 자비로운 배상금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고 그의 저택에서 비밀회의를 개최한다. 각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의 성공을 위해 스티븐스는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는 회의 당일 정신없이 일한 나머지 아버지가 쓰러져 임종하는 순간을 지켜보지 못하지만 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기쁨을 느끼면서 그 때의 희열을 회상한다.

하지만 정작 여행하는 동안 사람들이 달링턴 경에 관한 질문을 물을 때 스티븐스는 자신이 달링턴 경을 위해 일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긴다. 그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달링턴 경에 대한 근거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때문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달링턴 경이 유대인 차별주의자이고 영국 파시스트 연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이 지나친 소문에 의해 부풀려진 결과이며, 이를 진실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일히 해명하기 귀찮다고 말한다. 스티븐스가 전 주인인 달링턴 경을 변호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이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노력한 자신의 성과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링턴 경이 추진한 모든 행위가 정당하고 필요했다고 인정받아야 그의 집사로 일한 자신의 경력도 헛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달링턴 경이 파시스트 연맹 관련 인사들과 교류를 맺고 유대인을 내쫓은 일화는 그가 잘못된 사상에 동의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독일에 대해 가혹한 배상금 정책을 비판하고 패전국을 감싸안으려 한 그의 선한 의도는 점점 독일의 파시즘에 대한 동경으로 왜곡되어 버린다. 소설은 달링턴 경이 독일의 패권주의에 경도 되었음이 드러나는 장면을 통해 스티븐스가 주인의 명예를 위해 제시한 모든 근거들이 결국 자신을 위한 변호였음을 드러낸다.

민주주의에 대해 열변하던 한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의 친구가 그를 곤혹스럽게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달링턴 경은 스티븐스에게 정치, 경제에 무지한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자국의 민주주의보다 강력한 지도력을 통해 국민을 지휘하는 독일, 이탈리아의 정치방식이 부국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와 경제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그들이 주장하는 방식으로 따라야 한다는 달링턴 경의 주장은 얼핏 보면 타당해 보이지만 반대 의견을 묵살하고 한 방향으로 국가를 이끌었던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이 패망으로 끝났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의 주장은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달링턴 경이 독일 나치의 대사와 비밀 회의를 하는 순간, 그는 주인의 회의를 완벽하게 보조하는 것이 위대한 집사의 길이라고 믿는다. 그 때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한 켄턴 양은 자신이 지금 청혼을 받고 갈등을 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넌지시 스티븐스에게 자신의 마음이 있음을 고백하고 그가 자신을 붙잡아주길 기대하지만 스티븐스는 자신이 바로 역사상 중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은 나머지 켄턴 양을 보내주고 만다.

하지만 달링턴 경의 대자인 카디널 씨를 통해 스티븐스는 자신의 과업에 대해 혼란을 겪는다. 카디널은 지금 벌이고 있는 비밀 회의가 바로 나치의 선전 전략의 하나임을 폭로하면서 스티븐스에게 각성할 것을 주장한다. 오로지 주인을 믿고 그를 위해 일하는 것이 집사의 존재라고 믿고 있던 스티븐스는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카디널의 말에 동요한다. 하지만 그는 끝내 카디널의 충고를 깨닫지 못하고 주인을 바라보며 승리감을 맛본다.

’남아있는 나날’에서 가장 비극적인 부분은 주인에 대한 봉사가 최선이라고 믿던 한 노집사의 뒤늦은 후회와 슬픔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20여 년만에 켄턴 양과 재회한 스티븐스는 그의 기대와 달리 그녀가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사랑으로 승화시켰음을 깨닫는다. 한 때 집사 스티븐스와 함께 하지 못했던 과거를 후회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는 켄턴 양의 고백을 들은 스티븐스는 찢어질 듯한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웃는 얼굴로 사랑했던 여인을 보내주는 스티븐스의 겉모습은 쓰라린 헤어짐에 슬퍼하는 내면과 대비되어 더욱 비극적인 느낌을 준다.

해변 가에서 한 노인을 만난 스티븐스는 그에게 집사로서 살아온 자신의 삶이 모두 헛된 것임을 고백한다. 자신이 섬기는 주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그것은 결국 국가의 배신 행위를 돕는 꼴이 되었으며, 그 자신은 미국인 사업가의 일괄거래 품목의 하나로 팔려간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달링턴 나리는 나쁜 분이 아니셨어요.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리는 용기있는 분이셨어요. 인생에서 어떤 길을 택하셨고 그것이 잘못된 길로 판명되긴 했지만 최소한 그 길을 택했노라는 말씀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 알겠습니까? 나는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긴 세월 그분을 모셔 오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 (p299)

’남아있는 나날’의 미덕은 스티븐스의 비극을 단지 어리석게 묘사하고 조롱하지 않고 그의 쓰라린 좌절을 희망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이다. 작가는 노인의 말을 통해 지나간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고 남아있는 나날을 향해 나아갈 것을 요청한다. 




남아있는나날, 가즈오이시구로,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