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를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있다. 회의에 대한 다음의 최소한의 예의만 지키면 된다.

1) 지각은 없다. 10시 3분은 10시가 아니다.

2) 아이디어 없이 회의실에 들어오는 것은 무죄, 맑은 머리 없이 회의실에 들어오는 것은 유죄

3) 누군가 아이디어를 이야기할 땐 마음을 활짝 열 것. 인턴의 아이디어에도 가능성의 씨앗은 숨어 있다.

4) 말을 많이 할 것. 비판과 논쟁과 토론만이 회의를 회의답게 만든다.

5) 회의실 안의 모두는 평등하다. 아무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심지어 팀장의 아이디어에 대해서도 무자비해야만 한다. 누가 말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6) 아무리 긴 회의도 한 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7) 회의실에 들어올 때 텅 빈 머리일지라도 회의실에서 나갈 땐 각자 할 일을 명확히 알아야만 한다. 다음 회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너무 당연하고 하나마나 한 소리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 모든 원칙을 지키며 회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팀에서는 회의때마다 지켜지는 원칙이니까.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원고를 미리 읽은 사람들이 걱정한 점이었다. 회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도대체 저렇게 물 흐르듯 진행되다가 저렇게 깔끔하게 끝나는 회의가 어디 있냐는 것이다. 심지어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사람도 원고를 읽은 첫마디가 "이런 게 어디 있어!"였다. 본인은 현장에 잇었는데도 거짓으로 느껴지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19~20p.) -프롤로그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그토록 기다렸던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었다. 팀장님이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바로 그 프로젝트, 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단 한 번도 가능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바로 그 프로젝트, 광고주가 ‘갑’ 행세를 하며 광고 회사를 ‘을’로 강등시켜 버리지 않는, 광고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 취향에 따라 캠페인 전체의 생명이 오락가락하지 않는, 1년짜리 기업 캠페인을 만들어 오라면서 달랑 2주를 주는 그런 몰상식한 프로젝트가 아닌, 광고주의 욕심에 비해 예산은 쥐꼬리만 한 기형 프로젝트도 아닌, 광고 회사로서의 본 기능을 다 할 수 있는 프로젝트. 광고주가 솔직하게 자신의 아픈 부위를 보여 주며 의사 처방을 기다리듯, 광고 전문가로서의 광고 회사의 진단과 처방을 구하는 프로젝트. ‘갑’과 ‘을’이라는 밑도 끝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관계를 끝내고, 마침내 파트너로서 광고주와 광고 회사가 만나는 프로젝트. 바로 그런 이상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254~255p.)

외부 강의를 할 때면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나요?" 저의 첫 번째 반응은 제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짓는 겁니다. 저도 모르니까. 그리고 두 번째 반응은 골똘히 생각하는 척하는 겁니다.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하니까. 한 30초 뜸을 들인 후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이디어는 신출귀몰 지능범이다. 쉽게 잡히지 않는다. 언제 어디에 나타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이디어 잡기를 해 온 경험에 비추어볼 때, 출몰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을 한 군데 지적할 수는 있다." 그곳이 바로 여기, 회의실입니다.

"광고 발상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교실은 회의실이다."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틀이 없고 정해진 규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광고는 변칙의 싸움터입니다. 이 시끌벅적하고 변화무쌍한 변칙의 싸움터에서 소림사 마당에서 배운 약속대련만 원칙대로 고수하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물론 원칙은 있습니다. 하지만 승부는 원칙에서 나지 않습니다. 원칙은 누구나 구사하고 있으니까. 결국 승부는 현장의 적응력. 그러니 광고 발상을 어찌 배우고 가르치겠습니까? 그저 선배들 싸우는 모습 보며 배우고, 같이 싸우다 한 대 맞고 한 대 치며 또 배우는 수밖에. 그래서 광고 발상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교실이 회의실입니다. 여기, 회의실입니다.

회의실에서는 화학 작용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사람이 가져온 아이디어는 다섯 개다. 저 사람이 가져온 아이디어는 일곱 개다. 그런데 그중에 네 번째 아이디어가 제일 좋다. 그걸로 하자." 이것은 물리 작용입니다. "이 사람이 어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저 사람이 오늘 이런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그걸 합쳐 보니 뭔가 새로운 게 나왔다." 이것은 화학 작용입니다. 물리 작용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하지만 화학 작용은 쉽지 않은 과정입니다. 서울 대학교 장대익 교수는 그 화학 작용이 궁금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 팀 회의실을 실험실로 본 적이 있습니다. 주사 맞은 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는 것처럼. 그 때 장 교수가 찾아왔던 곳이 바로 여기, 회의실입니다.

하지만 회의실에 들어 왔다고 해서 모두가 바로 "아하!" 하지는 못할 겁니다. "뭐야? 이게."가 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던지는 말들은 물처럼 밍밍하고 판단은 술에 물 탄 거 같을 겁니다. 주사 맞은 쥐들보다 더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속 어딘가에 아이디어는 살아나갑니다. 그 밍밍한 물방울들 하나하나가 모여, 기어코, 강렬한 한 잔의 위스키로 증류가 되고 맙니다. 그 기적 같은 증류가 일어나는 곳, 바로 여기, 회의실입니다.

미술관에는 도슨트가 있습니다. 무엇을 봐야 하는지 우리를 안내해 줍니다. 여러분들이 방금 입장하신 이 회의실에도 도슨트가 필요합니다. 어떤 밍밍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강렬이가 되는지 안내해 줄 사람. 여러분들은 행운아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한 도슨트를 만나셨습니다. 제가 내고도 제가 떨어졌을 시험을 통과한 찬란한 신입 사원을 거쳐, 어떤 밍밍이도 흘려 보내지 않는 회의록을 정리하는 단단한 카피라이터. 무엇보다 회의실의 화학 작용을 가능케 하는 신비의 촉매. 단언컨대, 이 회의실을 안내받기에 더 좋은 선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뒤로 편히 기대 앉으셔서 김민철의 설명을 들으며 회의실 구경을 시작하십시오. 분명 즐겁고 동시에 유익한 시간이 되실 겁니다.

다시 한번 회의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박웅현(TBWA KOREA ECD)(5~8p.) -추천사 전문

사실 인간은 참 희한한 동물이다. 자기가 만든 말들(표어, 비전, 광고, 이념 등)에 감동하고 변화하며 심지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까지 한다. 내가 아는 한 지구상 어떤 생명체도 이런 이상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했고, 생물학자 도킨스는 새로운 복제자인 "밈(meme)"이라고 했나 보다. 인간은 유전적 적응도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단어를 만들고 문장을 창조하는 주체는 우리 자신이지만, 어떤 단어와 문장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우리를 유혹하고 이용해 먹기도 한다.(9~11p.)

회의는 늘 진지했다. 잡담과 농담이 회의 시간을 갉아먹는 경우는 관찰하지 못했고, 구성원 모두가 자발적으로 몰입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처음에 화두를 던지는 이는 박웅현 팀장이었지만 그가 회의를 ‘끌고’ 간다는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이 팀의 회의장 풍경은 한마디로 "아이디어는 평등하다"였다. 팀장의 아이디어나 인턴의 것이나 일단 시장(회의장)에 나온 이상 시세는 동일했다.

관건은 메시지의 정확성과 공감도이지 출처는 아니었다. 저자도 고백하고 있듯이 적어도 이 회의실의 행위자들은 이후에라도 ‘이게 누구의 아이디어였지?’라고 묻지 않는다. 공동의 작업에 그런 물음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거나 다소 촌스러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내 관점은 달랐다. 실제로 회의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란, 내게는 오히려 아이디어 자체가 여러 사람들을 자신의 동맹군으로 만드는 과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아무런 편견이 없는 외계 과학자가 있다고 하자. 그에게 회의실은 ‘누구의 아이디어인가’에 관한 경쟁이라기보다는 ‘아이디어가 누구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가’에 관한 싸움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사회학자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 network theory)으로 표현하면,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아이디어)가 네트워크를 이루며 자신들의 세력을 더 크게 키우는 각축장이 바로 회의실이다. 나는 이를 ‘밈들의 전쟁터’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이 회의실이 역동적이고 성공적인 이유 중 하나는, 단어들로 하여금 스스로 놀게 만드는 문화 덕분인지도 모른다.

이 전장에서 소위 멍 때리고 있는 행위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 회의실의 원칙이 말해 주듯, "아이디어 없이 회의실에 들어오는 것은 무죄, 맑은 머리 없이 회의실에 들어오는 것은 유죄"인 분위기였다. 단어들의 유혹에 견디려면 맑은 머리는 필수다.(11~12p.) -추천사(장대익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어느 날 박웅현 CD님(이하 팀장님)이 물었다. "회의록 정리 힘들어?" "아뇨." "회의록 정리한다고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면 안 해도 돼." "아니, 괜찮아요." "그래, 계속 해주면 고맙지. 이렇게 정리하다보면 너한테도 엄청나게 도움이 될 거야. 큰 흐름을 읽는 눈을 길러주거든."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게 회의록을 쓰는 동안 나는 성장했고, 회의록도 성장했다. 신입 사원 시절의 회의록을 꺼내 보면 많이 부끄럽다. 그저 회의를 기록해 놓았을 뿐, 어떤 흐름도 읽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쓴 회의록은 형편없더라도, 우리의 회의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닌 아이디어가 환골탈태하던 기억은 도이켜 생각해도 짜릿하다. (22p.) -프롤로그

거창하게 말하자면, 아이디어라는 녀석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세상으로 나가는지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아이디어도 진화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어느 날 문득 세상을 뒤집을 아이디어가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한 회의실에 모여 회의를 하고 또 한 결과 비로소 괜찮은 광고가 탄생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니 책 안의 모든 내용은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의 공이다. 나는 다만 충실한 기록자일 뿐이다. 다만 그뿐이다. (23p.) -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