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나오미 왓츠 주연의 영화 <투 마더스> 가 화제였다. 서로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 두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탓에 막장 소재로 논란을 일으켰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기사를 읽고 많은 관객들이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 원작 소설가 도리스 레싱은 단골 술집에서 만난 호주 청년에게 이야기를 직접 전해 들은 후 깊은 감명을 받아 영화의 원작 <그랜드마더스>를 집필했다고 한다. 도리스 레싱은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로, 해당 작품이 영화화되기까지 했지만 당시에는 마땅한 번역본이 없었다. 이번에 <그랜드마더스>를 포함한 중, 단편 4 작품이 번역 출간되었다.

작품 <그랜드마더스>는 햇살이 아름다운 바닷가 도시의 곶,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고 잔잔한 바닷물결이 일렁이는 아름다운 배경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렸을 적부터 레즈비언으로 오해받을 만큼 단짝이었던 릴리즈(릴)과 로잔느(로즈), 매력적인 두 여성들은 비슷한 시기에 결혼했고, 이후에도 이웃에 거주하며 릴은 이안을, 로즈는 톰, 각자 외동아들을 낳았다.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은 것만큼, 운명공동체처럼 서로의 아들까지 보살펴주며 살아간다. 마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비요른처럼 미소년으로 성장한 아들들. 이안은 로즈에게 모정 이상의 연정을 품기 시작하고, 로즈와 이안은 서로 모호해진 경계 사이에서 사랑을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톰도 어느새 릴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소설은 서로의 아들과 관계 맺는 금단의 사랑을 외설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아름답고 시詩적인 묘사 속에서 절제된 필치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장성한 두 소년의 아름다움, 이제 이게 순탄치 않는 문제였다.  열 여섯이나 열일곱 무렵에 잠깐 시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시기가 있긴 하다. 그럴 때는 젊은 신과 같다.....두 여자는 일어나 앉아 서로를 쳐다보며 놀라운 심정을 나눴다. "어쩜 세상에!" 로즈가 말했다. "그러게."릴이 맞장구를 쳤다. "우리가 만들었어. 우리가 저 아이들을 만들었다고." 로즈가 말했다. "우리가 아니면 누구겠어?" 릴이 말했다. (p.33)

넷의 사랑은 인간의 근원적인 판타지다. 사회적 금기를 넘나드는 사랑, 근친 관계, 모정과 연정의 경계 속에서의 애틋한 감정, 젊음의 혈기에 대한 동경과 만족감 등 그들의 사랑은 남여의 오래된 판타지 자체였다. 하지만 그 속에는 금기에 대한 불안, 늙어가는 육체를 향한 안타까움, 아들들이 정상적인 사회 관계를 맺길 바라는 모성이 공존했다. 사랑은 아이러니와 딜레마의 연속이다. 때로는 불안한 관계에 탐닉했지만, 때로는 좌절하고 울었다. 그들의 특수한 관계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심경 묘사와 갈등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그랜드마더스>는 에로스에 집중하기보다 매혹과 금기를 넘나드는 특이한 상황에서 그들의 판타지와 불안, 내면의 갈등과 좌절을 담았다. 절제된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여러번 되씹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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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 가(家)>도 독특했다. 런던 도심의 하층민 흑인 소녀 이야기를 그렸다. 흑인 소녀 빅토리아가 어떻게 중상층 백인가정 스테이브니가의 사생아를 가지게 되고, 그 아이가 스테이브니 가의 일원이 되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그러나 그 담담한 속에는 똑똑하고 선량한 하층민 흑인 여성이 사회 체제 속에서 어떠한 고생을 했고, 그녀에게 사회란 어떤 곳이며 결국 중산층 백인 청년의 사생아를 낳게 된 과정까지, 직접 드러내진 않지만 그 속에는 분명 사회적 부조리와 하층민 흑인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편견과 슬픔이 묻어나 있었다. 딸 메리가 백인 중상층 사회에 편입되기를, 그러나 엄마의 흑인 사회와 아빠의 백인 중상층 사회 속에서 정체성을 갈등할 딸에 대한 염려와 애틋함을, 절제된 문장 덕분에 오히려 곱씹을 수 있었다.

가상의 고대 도시의 흥망성쇠를 다룬 <그것의 이유>, 또다른 찬사를 받은 <러브차일드>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었다. 특히 <러브차일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으로 징집된 청년이, 영국령 케이프타운에서 유부녀와 나눈 사흘 간의 사랑을 평생 잊지 못해서 일생 자신의 사생아를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았다. 한편으로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연상케 했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심정과 지고지순한 사랑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랜드마더스>>.를 통해 작가 도리스 레싱을 처음 접했다. 큰 틀에서 사랑을 주제로 그렸고, 주제를 부각시키는 독특한 상황과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흥미를 넘어 인물들의 갈등과 번민을 따라가다보면, 사랑에 대한 근원적 판타지와 그에 따르는 불안, 좌절감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뭔가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공허감, 갑작스레 깨달으면서 터지는 감정들을 표현한 장면들을 여러 번 되읽었다. 무엇보다 절제되고 담담하기까지 한 문장력은 작가 특유의 매력이었다. <<황금노트북>>, <<다섯째 아이>> 등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