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 배경의 새 역사소설 ’노서아 가비’ 쓴 김탁환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는 현대적 여성 캐릭터 창조

"역사소설이라 해도 너무 사실에 압도당하면 소설적 상상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를 무대로 삼되 허구의 인물들이 활약하는 아라비안나이트로 읽히기 바랍니다."

소설가 김탁환(41·한국과학기술원 교수)씨가 신작 장편 《노서아 가비》(살림)를 냈다. 《불멸의 이순신》을 비롯해 《황진이》 《혜초》 《열하광인》 등을 통해 한국형 역사추리소설의 새 지평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아 온 지금까지의 ’김탁환 팩션’을 과거의 것으로 밀쳐내는 새로운 시도들로 가득한 작품이다.

소설은 19세기 말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배경 삼아 나라를 열강에 팔아먹으려는 자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목숨을 건 머리싸움을 그린다. 고종이 러시아 커피를 즐겼으며, 아관파천 당시 큰 재산을 모은 러시아 통역 김홍륙이 고종의 환궁을 막으려다 실패하자 암살을 시도했던 사실을 근거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소설의 무대인 러시아 공사관은 친로파(親露派)와 친일파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쟁투 대신 여자 커피 바리스타가 만든 ’노서아 가비’(러시아 커피)의 향기가 넘친다.

역사소설의 불모지대인 여성독자 개발을 위해 현대여성의 세련된 감각에 어울리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도 창조했다.

주인공 최월향은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의 감정에 솔직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자쯤은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대범한 여성이다. 왕실의 물건을 빼돌렸다는 죄목으로 머리가 거리에 내걸린 조선 역관(譯官)의 딸인 그녀는 자신의 운명에 맞서기 위해 반도를 떠나 ’따냐’라는 이름의 사기꾼이 되어 청나라와 러시아 귀족들의 돈을 뜯어낸다. 작가는 "요부가 아니면 측천무후 같은 권력욕의 화신으로 그려지던 이전 역사소설의 여성들과는 확실히 다른 여성 캐릭터를 만들려 했다"고 말했다.

왕을 둘러싼 권력 다툼만 그리지 않고 따냐와 그의 동료 사기꾼이자 애인인 이반의 사랑 이야기, 일국의 제왕인 고종이 따냐와 함께 모닝커피를 끓여 마시며 외로움을 토로하는 낭만적 장면도 곁들였다. 사랑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치는 어리석음이 여성의 몫이 아닌 남성이 저지르는 잘못으로 그려진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따냐와 헤어져 따로 입국한 이반은 이름을 김종식으로 바꾸고 고종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변신해 막대한 이권을 챙긴다. 그러나 고종이 왕궁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자 독살을 시도한다. 이반은 그 계획을 따냐에게 말하지만 따냐는 냉정을 잃지 않는다. ’이반은 나를 흔든 첫 남자였다. (…) 그러나 나는 남자의 사랑에 백이면 백 전부를 거는 여자가 아니다. 백 중 아흔아홉까지 마음을 준다 해도, 내게는 항상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최악을 대비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188쪽)

하루 8시간씩, 매일 50장 쓰기를 ’습관’으로 실천한다는 점에서 김탁환은 문학을 하는 예술가라기보다 소설을 쓰는 노동자를 자임한다. 작가는 "매일 쓰는 노동이 작가로서의 자세를 가다듬게 하고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도 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