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작가로, 첫손에 알랭 드 보통을 꼽기는 하지만, 그가 쓴 책 중 사랑 이외의 주제를 다룬 책은 처음이다.

그나마 말랑말랑한 사랑 외에 다른 주제는 너무 어려워서 책장이 넘겨지지 않을까 지레 겁을 먹었었다.

그러나, 여행에 대해 보통Botton 식의 접근을 한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때보다 한줄 한줄 더 많은 생각의 시간을 필요로 하긴 하지만..) 어렵다기보다는 너무 감동해서 '역시 알랭 드 보통!'하고 되뇌이었다.

 

이 책은 표지부터가 참 매력적이다.

원서의 표지는 다른 것이었는데, 한국 출판사에서 따로 디자인을 한 것인지 사람의 마음을 확 끈다.

누구나 좋아할 법한 비행기 창가에서 찍은 사진의 첫표지와 환한 빛이 들어오는 창과 밖을 내다보는 여자 모습의 뒷표지.

사진이 너무 좋아 이리저리 책장을 살펴봤더니, David Spero라는 사람의 비행기 연작(Aircraft Series)인 듯.

 

'출발 → 동기 → 풍경 → 예술 → 귀환'의 차례로 구성된 책은, 한 사람이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실제로 여행을 떠나, 이국의 정취를 찬찬히 뜯어보고, 내 것으로 만들어 돌아오는 여행의 모든 과정들을 다룬다.

번역자의 말대로 '왜 나는 여행을 하는가'라는 부제를 달아도 손색이 없는 내용이다.

보통은 여행에 대한 자신의 경험, 철학, 역사, 미술 등에 대한 모든 것을 녹여 이 책을 썼다.

각 이야기에 어울리는 (것 같은) 그림들이 여러 점 나와 있는데, 그림은 컬러로 나왔으면 더 좋지 않을까 싶었다.

특히나 한 부분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에드워드 호퍼의 경우에는 결국 화집을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 책에는 곳곳에서 파스칼의 '팡세'의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많이 들어봤지만, 제목만 딱 봐도 스르르 잠이 올 것 같은 그 책 속에 마음에 콕콕 와서 박히는 그런 명문들이 숨어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니, 팡세의 인용구절 뿐 아니라, 이 책의 모든 구절마다 절절 공감이 되어서 줄을 긋고 표시해두고 싶었다.

그러나 책 어느 곳에도 남은 흔적은 없다.

문장이, 문단이, 한 페이지가, 책 전체에 모두 줄을 긋고 싶었기에.

 

출발.

여행은 막상 떠나는 것보다, 여행사 의자에 앉아 스케쥴표를 보며 상상하는 것이 더 즐거울지도 모른다.

작년 가을, 뉴욕 여행을 꿈꾸면서 그 길거리를 걷고 있는 상상을 하며 가슴이 두근거리며 너무 신이 났었다.

그러나, 막상 갈 준비를 하려 하자, 비행기표를 사는 것, 비자발급 받는 것, 여행계획을 짜고, 일정에 따라 필요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일순간 뉴욕에 거리에 뚝 떨어져서 있고 싶은 만큼 있다가 어느 순간 다시 슝 돌아오는 그런 일은 내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다.

 

동기.

 

풍경.

영문학에 문외한인 나는 워즈워스하면 '무지개'라는 시 밖에 몰랐지, 그가 그렇게 자연을 주제로 한 서정적인 시의 대가인 줄은 몰랐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들도 좋았지만, 자연의 위대함과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구절들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 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댄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또다른 시.

 

내가 가끔 안락의자에 누워

마음을 비우거나 사색적인 기분에 잠겼을 때

수선화들은 그 내면의 눈앞에 번쩍하고 나타난다...

그러면 내 마음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

수선화와 어울려 춤을 춘다.

 

예술.

여행지에서의 감흥을 오랜동안 소유하기 위해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

보통은 이 책에서 여행의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존 러스킨이라는 사람이 주장한 미술을 통해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어떤 장면을 내가 그린 스케치 등으로 소유하는 방법이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이었으나, 언젠가 (내 작품이 '참담한 결과로 나타나더라도') 꼭 시도해보고 싶은 방법.

차를 타고 일순간 지나쳐가며 보는 풍경이 아니라, 하루종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그것을 화폭에 담고, 내 마음에 각인시키는 관찰적인 여행.

 

귀환.

일본은 가까운 나라여서인지 사실 우리나라와 닮은 게 너무 많다.

그런데, 일본여행에서 한국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사소한 것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며 신기해하는 나를 발견했더랬다.

한국으로 돌아가 일상생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 기분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 싶었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오자, 그 '낯설게 보기'는 까맣게 잊고, 다시금 하루 살기 급급한 직딩으로 돌아와버렸다.

 

온갖 장르를 드나들며 박학다식함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보통.

이 책에는 책들이 빼곡히 꽂힌 그의 침실 사진도 있는데, 그 사진을 보면서 정말 궁금해졌다.

"이렇게 모르는 것 없는 알랭 드 보통은 과연 무슨 책을 읽을까."

 

블로그를 하게 되면서, 여행지에 가면 꼭 일기를 챙겨 쓴다.

나의 여행 결과물이 책 속에서 언급된 훔볼트처럼 '안데스 산맥 식물 탐구' 같은 거창한 자료는 아니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꼭 남기고 싶은 정보들이기에, 더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된다.

기록을 남겨야 하기에 더 의문도 생기고, 더 관심도 생기게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