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운명의 여신이 나온다. 세 명이 한 조를 짜서 운영하는 이른바 팀플(팀명도 있다. '모이라: Moira'라고)을 하는데 각자의 역할이 골고루 나뉘어 있다.

클로소(Klotho)가 물레에서 운명이라는 이름의 천을 짜고,
라키시스(Lachesis)가 그 천에 무늬를 새겨 삶을 만들고,
아트로포스(Atropos)가 거대한 가위로 그 천을 자름으로 삶을 끝낸다.

이들은 각각 과거, 현재, 미래를 관장하는 여신으로도 불린다.

<레이스 읽는 여인>이란 제목을 보고 라키시스가 문득 떠올랐다. 아니 무늬를 새기는 것이 아니라 읽는 역할이니 전혀 다른 역할이려나.

라키시스가 떠오르며 Five Star Stories가 연상되었고 이게 지금은 완결이 되었나라는 의문이 생기며 검색을 해보았고 아직 연재중이란 사실에 살짝 치를 떨었다.
그러고 나서 운명의 여신은 시간,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여신을 의미하며 북유럽 신화에서의 모이라와 동격인 울드(Urd), 베르단디(Belldandy), 스쿨드(Skuld)가 떠오르며 이 분들도 팀플이며 팀명(Norn 혹은 Nornen)이 있다는 사실과 'Ah! My Goddess'라는 만화의 주인공격이라는 사실과 함께 과거 보거나 읽었던 영상과 이미지들이 스쳐지나갔다.

말이 길었군.

책을 펼쳐 들었다.

첫 문장.

'내 이름은 타우너 휘트니다. 아니, 거짓말이다. 내 진짜 이름은 소피아이다. 내 말을 믿지 말기를. 나는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나는 미쳤다. 이것만은 진실이다.'

젠장... 에피메니데스의 크레타인 패러독스정도 되는건가? 시작부터 머리 아프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문장이다. 분량이나 시작부터 쉬운 책은 아니겠다는 느낌.

내용은 미국의 마녀사냥이 있던 세일럼(Salem: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작은 마을인 세일럼에서 19명이 처형되고 150명이 구속된 역사적 사건이 벌어짐.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럼의 마녀들」을 통해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을 느낄 수 있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타우너(혹은 소피아)는 이 마을에서, 그것도 자신들이 선택한 레이스를 들고, 레이스의 문양을 통해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들의 마음과 미래를 읽어내는 예지력을 가진 '휘트니 가문'에서 태어났다. 타우너는 레이스 없이도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재주까지 가졌다.

뼈아픈 과거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떠난 타우너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오고 이로부터 타우너의, 타우너 가족의, 타우너와 관련된 사람들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대부분 타우너의 일인칭 시점을 통해 전개된다.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고 미쳤다고까지 얘기하는 타우너의 시점에서... 하지만 책의 내용이 어찌보면 단조로울 수 있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생활인데도 불구하고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진행시키는 강한 흡인력 때문에 중반 이후에는 위의 사실을 까맣게 잊고 타우너와 할머니의 죽음과 관련한 수사를 담당한 형사 캐릭터에 몰입되어 그들의 고통과 고민을 같이 느끼게 된다.

작가의 편안하지만 강렬한 문장은 스릴넘치거나 독자를 요동치게 하는 대신에 조용히 등장인물들의 삶과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을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p.s. 게다가 책의 마지막 부분은 반드시 책의 '첫 문장'을 다시 잃어보게 하는 힘 또한 가졌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