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러 있든 떠나 있든 사람은 늘 ‘그리움’ 속이다. 애초에 ‘나’는 비어 있는 물그릇이나, 길을 가다 바람을 스치고, 돌을, 나무를, 시내를 만나면 거기서부터 그리움이 자생한다. 골목길을 걷다 천진한 어린 아이와 마주치고 이웃에 사는 이를 만나 몇 마디 얘기를 나누는 사이 그리움은 커진다. 홀로 방안에 앉아 옛 선현의 한 줄 글귀를 마주하기라도 하면 그리움은 또 아득하여 몇 마디 긁적이는 문장으로 새로 태어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애오라지 빈그릇에서 낭창낭창 넘칠 것 같은 그리움으로 가득찬 그릇으로 변모한다.

 

  나는 ‘최치원 선집’을 ‘그리움’이란 한 단어로 읽었다. ‘바다’와 ‘갈매기’와 ‘꽃’과 ‘나무’와 ‘바위’와 ‘시내’, 세상 온갖 물상들이 ‘그리움을 담는 그릇이자 스스로 그리움 자체이다.’ 친구도 시간도 숨 쉬는 공간조차 그리움이다.

 

  천 년 전 그의 삶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유학길에서부터, 치열한 10대와 20대, 돌아온 후의 나날들, 그의 열정적인 삶을 반추하기란 불가능하다. 그의 삶 속엔 온갖 일들이 일어났겠지만, 오늘은 우리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 한 자락 ‘그리움’으로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다.

 

  그가 신라를 떠나 혼란 속에 있던 당나라에서 보낸 ‘청춘’을 따뜻한 맘으로 보듬어주고 신라에 돌아와 되려 이방인이 되어버린 그의 울적한 심사를 달래 주고 싶다. (당에서는 고향땅을, 돌아와서는 청춘을 바친 중국땅을, 세속에서는 청산을, 청산에서는 못내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 속세를 그리워했을 인간 본연의 그리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간 그의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와 무엇이 그리 다를 텐가-라고 한다면 나의 오만인가)

 

  사실 나는 시와는 인연이 별로 없다. 스스로 ‘인연 만들기’를 거부해 왔는지도 모른다. 두려움 때문이다. 시는 소설처럼 잘 읽히지도 않고, 수필처럼 쉬이 마음에 와 닿지도 않는다. 아주 가끔 펼친 시집과는 사귀기보다는 씨름하기가 일쑤다. ‘끙끙’대며 살아온 시간 속에 어느새 나는 ‘냉혈동물’이 되고 말았는가. ( ‘시가 어려운 게 문제지!’ 라고 항변하는 마음 속 목소리는 꾹꾹 누르고 있다)

 

  그런 내가 고리타분한 ‘한시’와 접맥을 시도하다니, 그것도 조선 후기 정도도 아닌 저 아득한 천년의 시간도 더 지난 ‘최치원’의 글이라니! 이번 책읽기는 실패를 전제한 무모한 시도였다.

 

  처음엔 마치 산문을 읽듯 쭈욱 읽어나갔다.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머리로 이해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역자가 친절하게도 글이 지어진 배경이나 고전에서 인용된 부문을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시에는 작자의 감정을 최대한 이입해서 읽으니 십분 내용을 이해하기 쉬웠고, 산문은 시대적 배경을 살짝 떠올리며 읽으니 그럭저럭 끝을 낼 수 있었다.

 

   독서란 일단 끝을 보는 게 중요하지 않던가! ‘헉’ 그런데 ‘왜’ 읽고 돌아서는 뒷맛이 개운치가 않지. 마치 11월 길가에 나뒹구는 마른 벚나무 이파리마냥 마음속이 ‘퀭’ 한 거지?

 

  작자가 있고, 시(혹은 글)가 있고, 분명 독자가 있어야 했다. 그래야 했다. 나의 독서엔 ‘독자’가 없었다. ‘자신의 눈을, 마음을 가진 독자’가 없었다. 나는 대부분의 글들을 그렇게 읽어오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책’, 읽어야 하니까, 그래서 ‘어떤 의무감’ 속에서 기계적으로 읽어왔을 뿐......

 

다시 읽어야 했다. 헛되지 않으려면. 그래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면 나의 책이 아닐 것이다.

 

  시 부분만 옮겨 적으며 읽었다. 부족한 한문 실력이지만 가끔 사전을 뒤적이니 제법 읽을만했다. 천천히, 매우 천천히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속’을 자극하는지를 새삼 느꼈다. 시 속에 최치원 그의 감정만이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그 속에 오늘날 우리들 누구나가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성’이 녹아있음을 알 것 같았다. ‘나’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특별한 감정도 있었을 테지.

 

  그리움은 ‘겨울날 새벽, 바닷가에 나가 앉으면’ 찾아오는 그런 것이다.

 

  그리움은 ‘바다 밖에서 불어오는 봄바람’ 속에 설레는 마음이다.

 

  그리움은 ‘봄놀이 약속을 저버린 친구에 대한 야속함’ 이다.

 

  그리움은 ‘훗날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는 다짐 속에도 있는 것이다.

 

  그리움은 ‘가을밤 등불 앞에 홀로 읊는 시’ 이다.

 

  그리움은 ‘눈 가고 마음 가는 모든 물상’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廣陵城畔別蛾眉   광릉성 기슭에서 이별했던 아리따운 모습을

 

  豈料相逢在海涯   이 바닷가에서 다시 만날 줄 어찌 알았으리

 

  只恐觀音菩薩惜 관음보살 아끼시던 일이 두려워

 

  臨行不敢折纖枝 떠날 때 한 가지도 꺾지 못했지

 

                                                 <題海門蘭若柳 해문사 버드나무>

 

  가장 맘에 들었던 시다. 시인이 어떤 맘으로 읊었는지는 몰라도, 우리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재회도 이렇듯 아름답기를 바라지 않는지. 가는 가지 하나도 쉬 꺾지 못하는 시인의 마음처럼, 오랜 그리움이 쌓인 만남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 말 한마디,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조심스러울 테지. 만남이 아름답고 떨리는 이유는 오랜 시간 담아온 그리움 때문이 아니던가.

 

  根愛泥沙性愛海   뿌리는 진흙 사랑 성품은 바다 사랑

 

  實如珠剭甲如蟹   열매는 진주 같고 껍데기는 게 같아라

 

  酸中甘味何時來 새콤달콤한 고것 언제나 맛볼까

 

  葉落風高月建亥 잎 지고 바람 높은 시월이라네

 

                                                             <石榴 석류>

 

 참 예쁜 시라는 생각, 지난 설에 산 석류를 지금에야 먹고 있는데, 혀끝을 자극하는 새콤한 맛이 자꾸 찾게 한다. 우연히 석류나무를 보고 지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에게 10월에 함께 석류를 까먹던 어여쁜 연인이 있지는 않았을까, 석류알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밤잠을 설치진 않았을까, 이 석류 속에 어떤 그리움이 숨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