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과학책’이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EBS특강을 통해 저자를 알게 되었고, 그의 강의가 편하면서도 재밌어서 그의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명 ‘업계종사자’가 아닌 나로서는 과학은 먼 세상의 일이었다. 과학이 만들어낸 혜택을 누리고 살면 그 뿐인.

그러나 과학에 ‘생명’이 들어가니 완전 다른 존재로 다가왔다. 과학이 ‘생명’을 만남으로써 온갖 ‘가치’의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생명’은 나의 일이기도 하고 우리의 일이기도 하니까.

어렵고 복잡할 것만 같은 이 ‘생명과학’은 의외로 간략하고 쉬워보였다. 모든 생명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의외로 ‘생명의 진화’는 그리 복잡해 보이지는 않았다. (강의만큼이나 편안한 저자의 글쓰기가 한 몫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윈의 ‘진화론’은 (현재까지는) 생명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지적 욕망을 가장 충실히 설명해 주는 (현재 진행형의) 이론으로 보인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도킨스에 따르면 자연 선택의 결과로 태어난 오늘날의 생명체들을 보면 마치 숙련된 시계공이 설계하고 수리한 결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계공이 나름대로 고쳐보려 애쓰는 과정에서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다 정말 가끔 요행으로 재깍거리며 작동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진화가 반드시 ‘進化’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진화는 ‘직선’이 아닌 다양한 방향과 곡선으로 이뤄진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공과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이 더 가까울지 모른다. 의도한 바대로 나아가는 ‘배나 비행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발전이라고 여겨온 것이 반드시 ‘발전’이 아닐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달리고 있지만, 우리 주변의 환경 또한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붉은 여왕 효과)

인간이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하고 있는 온갖 인위적인 일들이 반드시 ‘進化’는 아님을 우리 인간은 알고 경계해야 한다.

야생 조류의 개체군은 유전적으로 다양한 개체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그들 중 한두 마리가 감염되어도 좀처럼 전체로 번지지 않는다. 그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부족한 개체들 일부가 죽어 나갈 뿐 유전적으로 다른 대부분의 개체들은 살아남아 자손을 퍼뜨려 죽은 개체들이 비워준 공간을 메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기르는 닭은 오랜 세월 특별히 알을 잘 낳는 닭들을 가려내는 인위 선택 과정을 거치는 바람에 비록 유전자 복제 기술에 의해 만들어지진 않았어도 거의 ‘복제 닭’ 수준의 빈곤한 유전적 다양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일단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닭장 안으로 진입하기만 하면 모든 닭들이 감염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

여기에 기막힌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문제의 소지를 갖고 있는 유전자를 기능적으로 훨씬 우수한 맞춤 유전자로 갈아 끼운 개인은 개선된 것이 분명한데, 이렇게 개선된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 즉 개체군의 상황은 어떤가? 각 개인은 확실히 더 우수해졌는데 모두가 동일한 유전자를 지니게 되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상황이 아니던가? ..........만일 우리 국민 전원이 하나의 맞춤 유전자로 치환된 상태에서 공교롭게도 그 유전자만을 골라 공격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한반도에 상륙하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닭장 전체를 순식간에 삼키듯 대한민국도 하루아침에 쑥대밭으로 무너질 수 있다.

참으로 기막힌 모순이다. 유전자 치환은 개체는 보다 탁월하게 만들어 줄지 모르지만 개체군은 더없이 취약한 상황으로 내몰 수 있다.

진화론의 매우 흥미로운 주제 가운데 하나는 왜 생명체는 ‘암수’로 나뉘어 진화했는가 하는 것이다. 암수한몸이 가지는 유전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생명체가 암수로 나뉘어 진화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또 인간이나 몇몇 동물들이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게 된 까닭은? ‘레크’라는 특별한 성문화(?)는 왜 생겨났을까. 이런 문제를 진화론 혹은 유전자의 입장에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다윈 탄생 200주년이 지난 지금 ‘진화론’은 아직도 많은 논쟁 속에 ‘진화’하고 있는 것 같다. 남아 있는 숙제는 바로 ‘자유 의지’ 뿐인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유전자’로 풀어내는 날이 온다면, 과학자도 철학자도 더 이상 할 일이 없겠지. 인간의 ‘자유의지’ 또한 더 이상 ‘자유의지’가 아니겠지. ..........!

다윈, 진화론, 종의기원, 탄생200주년, 최재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