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늦은 밤, 뒤척이다 TV를 켰다. ‘EBS 특강’이 진행 중이었다. 인간이 ‘번식’의 시기를 마치고도 50여년을 더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재테크로 마련한 돈으로(물론 마련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을 테지만)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고 여가를 즐기며 살아가기에, ‘50년’이라는 시간은 실로 엄청났다.

 

  최근 들어 부쩍 앞으로 ‘살길’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50년이란 말을 듣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났다.

 

  지금이 내가 ‘인생 2모작(최재천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의 씨를 뿌려야 할 때이며, 건축으로 치자면 아예 재건축을 할 것인지 리모델링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때임이 명백했다. 재건축이 되었건 리모델링이 되었건 새로 건물을 단장하려면 시간이나, 돈, 이권의 문제 등 여러 가지가 해결되어야 하듯 나에게도 걸림돌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머리를 싸매고 있어봤자 뾰족한 수가 있으랴. 그래서 해결의 작은 실마리라도 찾고자 고른 책이 ‘인문학 콘서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직면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실마리를 찾았다는 것, ‘인문학적 가치’로 내 건축의 ‘뼈대’를 세우기로 우선은 결심한 것이다.

 

  과연 ‘인문학’ 이 내 건물을 붕괴로 내몰아가지 않고 튼튼하게 해 줄 좋은 ‘자재’가 되어줄지 나에게는 깊은 사고와 지체 없는 행동과, 그리고 사회의 도움이 절실하다.

 

  ‘인문학’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석학들의 표현을 빌자면,

  “포괄적인 그림을 그려줄 수 있는 것”

  “쓸모라고 생각되는 것 바깥의 쓸모”

  “無用之大用”

 

  표현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개인의 ‘삶의 목적과 가치’, 사회와 국가의 ‘존재 이유와 책무’와 같은 인간 삶의 본원적인 것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그런 존재라는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러나 인문학이 제 혼자서 해 낼 수 있는 일이란 ‘상아탑’ 속에 갇혀 있거나, 혹은 ‘유한계급의 호사스런 취미’ 정도로 남을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최근 대두되는 화두가 ‘통섭(統攝)’인 것 같다.

 

  정부에서조차 ‘인문학을 바탕으로 자연과학, 생명과학, 첨단기술 등의 영역을 통섭하는 창의적 소프트파워를 개발하고, 정부 정책 기조에도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하니 이미 ‘통섭’의 문제는 단순히 학자들 간의 논의나 주장의 단계를 넘어 ‘사회의 강력한 요구’에 직면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통섭’의 길은 그리 순탄해 보이진 않는다. 우리 아이들의 교육현장은 이상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대학도 변화의 조짐이 크게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정부는 말로 외치는 것과 달리 ‘교육 기회의 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상상해 본다.’

 

  ‘나는 두 번째 대학엘 들어갔다. 아침에 노자강의를 듣고, 퇴근 후 저녁에 생물학을 듣는다. 학비는 정부 보조금과 생활비를 조금 아껴 충당하고 있다. 수업을 마치고 딸아이를 만나 학교밥을 먹으며 요즘 음식이 맛없다는 둥, 비싸다는 둥 투정을 하기도 하고, 요즘 읽고 있는 딸아이의 책에 대해 조언도 해 준다.’

 

  인문학이 사회 전체가 나아갈 그림을 그리고, 여러 학문간 통섭을 통해 그 가치를 실현하는 그런 날이 다가 오고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노인’이란 이름이 ‘사회의 부담’이 아니라 ‘지식과 지혜’로 사회에 공헌하는 이름이 되고, ‘누구나 교육받을 권리를 누리고’ 가난이 부끄러움과 좌절이 아니라 ‘청렴’의 모습이 되는 그날이 오고 있다고 믿고 싶다.

 

  얼마 전 SNS에 가입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알 것 같은 인물이 뜨는데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진 그런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21세기 컴퓨터는 다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전화번호부터, 은행기록, 물건 구매기록에 심지어 나의 운신의 폭까지 모두 감시당하고 있다. 끔찍했다.

 

  21세기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하는 말은 틀렸다. ‘확실히 공포스런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사람을 신뢰하고, 사람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인간은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인문학이 단순히 ‘교양’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다.

 

  ‘인간 존엄의 회복’ 이것이야 말로 인문학의 최고 가치가 아닐런지.

 

  도정일 교수는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한다.

 

  첫째, 나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둘째,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셋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것은 지금 내가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인문학, 통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