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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학문의 길’로 혹은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된 어릴 적 얘기들을 더러 접하게 된다. 그 속에 자리하고 있는 중심은 늘 ‘책’이다. 집안에 책이 많은 좋은 환경이었다거나, 어려운 시절 헌책방에서 자신의 삶을 바꾼 책을 발견한다거나, 성격이 활달하지 못하여 책을 동무삼았다거나, 그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을 것이 나에게는 부러움과 탄식으로 다가온다. 특히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얘기가 자신의 독서의 원형이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을 만나면 한없이 흠모할 따름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척박하고 매말라 있다. 누구나 다 있는 ‘동아전과’ 한 권을 가져보지 못했고 그 흔한 동화책 한권이 없었다. 오로지 고등학교를 다니던 오빠의 책장에 꽂혀 있는 ‘고전문학전집’ (그것도 세로로 읽어야 하는)이 전부였다. 호기심에 몇 차례 들추어 보았지만 석장을 넘기지 못했다. 그 시절 나에게는 완전 재미없었다. 책과의 첫 인연이 ‘재미없는’이었다. 그러니 책을 좋아하여 도서관을 드나들며 책을 친구삼지도 못했다.

감수성도 지식도 빈약한 나의 어린 시절은 늘 부끄러움이다. 처음 책이랄 만한 것을 접한 것은 대학시절이지만 그 때도 몇 권 읽어내지 못했다. 책은 나에게 늘 부끄러움이자 동경이다.

요즈음 책이 주변에 넘쳐나고 아무리 간고한 삶을 살고 있다 해도 조금 애쓰기만 하면 구할 수 있는 것이 책인데도, 나는 아직 내 삶의 반전을 가져다 줄 책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뛰어난 안목으로 단번에 찾는 이들처럼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맘이지만, 아무래도 어려울 듯하다. 한권한권 쌓아서 한발한발 밟아가야 하는 것이 책에 대한 나의 운명이라면 운명일 테지.

책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만의 생명력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 책의 인생이 어떻든 누군가, ‘사람’과의 인연으로 태어나 흐르고 사라진다. 이 책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는 그런 책의 인생에 관한 것이다. ‘조선’이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책의 인생을 들여다본다. 그 속에 사람과 사회가 있다.

오늘날 그 생명을 다 했거나 박물관에 박재된 채로 존재하는 책들이 우리들에게 전하는 연약한 듯 끈질긴 메시지를 담았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이 점에 놓여 있다. 근대 이전 수많은 책들은 지식인들에게 읽히고 해석되면서 자신의 가치를 발현하였다. 나는 그들이 읽었던 책들을 오랫동안 다시 읽고 생각하면서, 그 책들이 지금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다. 책은 언제나 시대와 독자의 해석을 기다리며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는 하나의 텍스트였지만, 동시에 그 해석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수시로 변화시키면서 사유의 역사를 만들어 온 주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각각의 책에 스민 옛 사람들의 자취를 더듬어보고, 책의 성립과정을 살피며, 현재 남아 있는 책의 판본을 정리하고, 나아가 그 책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일이 아니겠는가’ 저자의 출사표다.

책을 읽고서 다시 ‘차례’ 부분으로 돌아와 보았다. 이렇게 구성한 저자의 깊은 사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듯도 하다. 과거에도 한 시대를 풍미한 책들이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많았으리라. 그 가운데 5개의 분야를 정하고 그 안에 품을 각각의 책을 고르는 것은 분명 고된 작업이었을 것이다. 한 권에 다 담을 수 없어 거르고 거르며 안타까워했을 저자의 마음이 조금은 느껴진다고 하면 주제넘어 보일까.

처음 ‘재미난 소설’로 문을 열고, 왕양명의 어록을 제자들이 기록했다는 『傳習錄』을 마지막에 둔 저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책은 재미로 시작하여, 진리를 궁구하는 데서 끝난다’ 이는 곧 우리네 삶이 ‘욕망에서 비롯되어 진리로 열매 맺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 감히 넘겨짚어 본다.

‘진리를 향해 용맹스럽게 나아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성인을 향한 힘찬 기상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단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고 자신의 삶과 세상살이를 통찰하는 그들의 정신을 우리는 『傳習錄』을 통해 새삼 배우는 것이다.’ 저자의 마지막 메시지다.

조선, 지식인, 서가, 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