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들이 그들의 섬에서 음모를 꾸몄다. 갑자기 나라를 잃었고, 두려움에 흩어졌다. 그들의 무기 앞에 어느 나라도 지탱할 수 없었다. 카트, 코드, 칼케미쉬, 아르자와, 알라쉬야도 [단번에] 무너졌다. 캠프는 아무루의 땅 안에 [세워졌다.] 그들은 그곳 사람들을 쓸어버렸고, 그 땅은 아무도 살지 않았던 곳처럼 변했다. 그들은 이집트를 향해 왔다. 하지만 불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펠레셋, 제케르, 셰켈레쉬, 샤르다나, 다누나, 웨세쉬 연합군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끝까지 손을 뻗었고, 그들의 마음 속은 자만심과 확신으로 가득했다. " 

 

 

 

고대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3세의 비문에 남아 있는 기록이다. 왕들의 계곡 근처 메디넷 하부에 있는 무덤 사원 벽면에서 찾았다. 기원전 1200년 무렵에 지중해 동부에 있는 수많은 도시와 국가가 갑자기 멸망했다. 시리아 북부에 존재했던 고대 도시 우가리트 유적에서 발굴된 점토판을 보면 이민족의 침략으로 절망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 남아 있다. 역사가는 이 침략자들을 <해양민족> 또는 <바다민족>으로 일컫는다.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 크레타 문명, 히타이트 제국, 이집트 제국, 동부 지중해 연안을 아우르는 청동기 시대 네트워크가 이들의 침략으로 몰락했다. 이집트만이 해양민족과 싸워 이겼다. 람세스 3세의 비문에 남아 있는 기록이 이 승리를 전한다. 그런데 상처뿐인 승리였다. 이집트는 쇠락해서 다시는 고대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이집트는 존속이라도 했지 다른 문명은 순식간에 멸망했다. 이 사건은 고대사 최대의 미스테리로 여겨진다. 해양민족은 몇몇 기록에만 남아 있으며 이들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비문에 언급된 <펠레셋>은 성경에 나오는 블레셋이며 현재 팔레스타인 인들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삼손과 데릴라,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 나온다. 히브리 인들이 이집트 탈출 후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이전 최대, 최악의 적이다. 과연 골리앗은 해양민족의 후예일까?

 이 책의 저자는 고대사 최대의 미스테리라고 할 수 있는 청동기 국제 시스템의 몰락이 과연 해양민족의 침략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 때문인지 탐구한다. 저자는 먼저 몰락 이전 청동기 문명이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하는 기원전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를 중심으로 지중해 동부 세계가 어떻게 교류하며 발전했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놀랄만한 가설을 내놓는다. 당시 국가와 도시들의 교류가 현재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못지 않은 국제 체제 아래에서 이루어졌단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은 로마제국 시대에도, 중세 유럽에도 갖춰지지 않았다. 여러 문명이 서로 상호작용하거나 부분적으로 상호의존하는 글로벌한 세계체제는 지금 시대와 고대 청동기 시대 딱 두 차례만 존재했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 지역들에서 발굴된 점토판에 적혀 있는 기록과, 지금도 계속 새롭게 발견되는 고고학 유물들에 남아 있는 흔적을 근거로 이런 과감한 주장을 펼친다. 교역, 전쟁, 음모, 결혼, 살인, 납치, 기후 변동, 지진, 가뭄, 군사 스파이의 활약이 기록과 유물에 남아 있다. 기원전 15세기부터 찬찬히 살펴보다가 마침내 멸망의 시대로 들어가 이 지역에 남아 있는 기록과 유물, 그리고 지층에 흔적을 남긴 기후까지 종합적으로 검토해 이 세계 체제가 붕괴한 이유를 추정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고대 청동기 국제 체제가 멸망한 원인을 해양민족의 침입에만 돌릴 수 없다. 기후 변동과 가뭄이 근동 지역의 농업생산력을 감소시켰고, 지진으로 도시가 타격을 받기도 했으며, 문명 내부에서 내전이나 반란도 있었다. 물론 해양민족이 침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원인은 각각 작용하지 않았다. 하나의 원인이라면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다. 고도로 발달한 청동기 문명들의 네트워크가 너무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가뭄이나 외적 침입과 같은 사건들이 마치 나비효과처럼 시스템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가져왔다. 이것은 미국에서 부실한 채권때문에 촉발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2008년 전세계 금융위기를 가져온 일과 본질적으로 같다.

 청동기 시대가 멸망하고 많은 문명이 멸망하거나 다시는 과거의 성세를 되찾지 못했다. 국제 체제도 붕괴했다. 그렇다고 인류 문명이 후퇴했는가? 우리는 청동기 다음 철기 시대가 왔으며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 제국이 번영했다는 역사를 안다. 어느 한 문명의 붕괴는 비록 혼란과 고통을 수반하지만 새로운 문명이 번영하는 밑거름이 된다.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여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수많은 인명과 지명에 익숙하지 않아서 쉬운 독서는 아니었다. 고대인들이 남긴 점토판 기록문이 때론 지루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록과 유물에 근거해 당대를 생생하게 묘사한 내용이 좋았다. 과감한 주장과 결론도 납득할 수 있었다. 관련 책이 쌓여 있는데 이 책을 계기로 좀 더 나아갈 수 있겠다. 

청동기, 지중해, 글로벌체제, 해양민족, 이집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