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소설집 [비 온 뒤]는 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개 거짓과 편향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드물게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날카롭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타인과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인지 편향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리 주위에서 진실을 말해도 듣지 못한다. 이 책은 전자와 후자가 만나서 일어나는 사건을 예리하게 포착한 단편집이다. 

 

 첫 단편 <조율사의 아내들>에서 피아노 조율사 오언 드롬굴드는 맹인이다. 그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설정이 의미심장했다. 그는 첫 아내 바이얼릿 덕분에 먼 곳까지 이동해 조율 일을 했으며, 그녀가 들려준 묘사 덕분에 사는 집이 어떻게 보이는지, 주변 경치가 어떤지 상상할 수 있었다. 바이얼릿이 죽은 후 그는 벨과 결혼한다. 조율사는 바이얼릿과 결혼할 때 벨을 거부했다. 벨은 그 기억때문인지 죽은 바이얼릿을 질투하며 그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조율사는 이 사실을 깨닫지만, 그가 보지 못하듯이, 모른척한다. 

 

 질투에 빠져 거짓을 말하는 사람과 거짓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사람. 이 둘의 만남은 이야기를 자아내지만 대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두룩하게 목격하는 일이다. 어릴 때에는 세상이 단순해서 어느 한 방향으로만 굴러가야 정의로운 줄 알았다. 거짓과 불의는 배제해야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흑과 백, 적과 아군은 분명해 보였다. 지금은 아무리 선의에서 나왔어도 단순한 흑백논리가 얼마나 위험한지 역사를 통해 안다. 진실은 명쾌한 구분이 아니라 거짓과 사실 사이에 있는 팽팽한 긴장에서 나온다. 영원불멸한 확고한 구분은 진실이 아니라 허상이다. 

 

 <조율사의 아내들>에서 맹인 조율사는 재혼한 아내의 거짓말을 받아들인다. 그 결과 꿈조차 바뀐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질투에 사로잡혀 모든 사태를 바이얼릿과 연관해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세상을 하나의 가치로만 재면 나머지는 그 가치에 종속된다.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일은 무엇이든 정당화된다. 한편, 트레버의 작품 속에서 진실을 아는 사람은 편향에 사로잡혀 일방으로만 치닫는 사람을 제어하지 않거나, 못한다. 편향과 집착은 중독과 같아서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면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복잡한 삶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거짓과 타협해서 어울려 살아가지 않으면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밖에 없다. 트레버의 작품에서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타협한다. 

 

 <우정>에서 꽤 괜찮은 남자와 결혼한 프란체스카는 어머니이지만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절친한 친구 마지는 아이들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작은 관심으로 알아채는데 말이다.  이는 프란체스카가 가정과 뭔가 어긋나 있다는 의미다. 그녀는 사회 통념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혼과 출산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그녀의 진실한 욕망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마지를 통해 알게된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 이유도 가족이 그녀의 마음을 다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륜이 들통나는 큰 일이 생겨도 그녀는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익숙한 곳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 곳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그 대가로 마지와의 우정을 끊는다. 남편 입장에서 마지는 아내의 불륜을 이끌었고, 방조했으며, 앞으로는 끊임없이 그 사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마지는 이 모든 걸 이해하고, 저항하지 않으며, 받아들인다.

 

 작가는 이런 삶의 태도를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네 삶이 이렇다고 보여준다. 진실이 항상 삶에 도움이 될까? 부모들은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장 나쁜 짓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아이들이 하는 거짓말은 성장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거짓말을 통해 사회적 가면을 쓰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잘 알지 않는가? 부장님이 하는 썰렁한 농담을 듣고 재미없다 짜증을 낼 수는 없다. 진실과 거짓은 동전의 양면처럼 삶을 만든다. 

 

 표제작 <비 온 뒤>는 우리 삶의 진면목을 깨닫는 주인공이 나온다. 어릴 때 부모의 이혼으로 마음의 상처를 가진  해리엇은 연애가 끝나자 이탈리아로 여행을 간다. 그곳은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곳이다. 그녀는 혼자 여행을 하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본 끝에 약간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녀가 사랑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자,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상황을 바꾸려고 더 밝은 현재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래의 불변성을 강요하자, 그는 다른 남자들처럼 물러섰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피해자였다. 해리엇은 이제 그것을 생생할 정도로 분명하게 알고 있으며,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전에는 왜 몰랐는지 의문이 생긴다. 펜시오네 체사리나 체류의 고독을 깊이 생각해보아도 아무런 답은 나오지 않고, 그녀는 앞으로도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을 것임을 느낀다.”

 

 기대는 다른 곳으로 마음을 두지 못하게 한다. 편향을 부른다. 편향은 집착을 부르고 영원을 강요한다. 영원의 다른 말은 곧 실패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실패 후 해리엇은 홀로 떠난 여행에서 고독을 배경으로 이 사실을 알아챈다. 그러나 왜 그런지 분명한 것은 없다. 왜냐면 삶은 분명하지 않으니까. 진실과 거짓 사이를 진동하는 용수철 같으니까. 확고한 진리를 잡고 싶다면 진동하는 용수철을 정지시켜야 한다. 그러나 정지는 곧 종말이다. 우리는 불확실한 삶의 경계를 조심스레 헤쳐 나가야만 할 운명이다. 

 

 

 

윌리엄트레버, 비온뒤, 편향, 진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