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달간 일을 쉬게 되면서 평소에 듣기 힘들었던 평일 낮 시간의 좋은 강좌들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하는 ‘고전의 향연6’ 강좌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신청, 등록했다. “구약 성경과 신들”의 저자로 푸른 역사 아카데미에서 ‘바알 신’ 강의를 하신 주원준 선생님이 첫 번째 강사이기도 했다. 인류 최초의 문명, 고대 수메르 시대의 신화가 지금 어떤 의미로 살아 숨쉬는지 호기심이 무척 갔다. 이 서사시의 줄거리 요약은 이래 저래 접한 적이 있는데 상세하게 읽기는 처음이다. 

 카톨릭 평신도 신학자로 고대 근동학, 구약학에 전공하신 주원준 선생님이 길가메쉬 서사시의 내용이 어떻게 고대 유대교, 기독교에서 흡수되고 변용되었는지 잘 알려 주시리라 기대했다. 선생님의 저서 ‘구약 성경과 신들’에서도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온 가시 나무의 젊음을 되돌려 주는 능력이 기독교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해설한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강의 전날, 오랫만에 만난 대학 시절 동기, 선배와 지나치게 술을 마시는 바람에 막상 강의는 듣지 못했다. 그렇지만 책이라도 이렇게 읽었으니 강좌 신청이 꼭 헛되지만은 않았다. 

 길가메쉬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쉬는 대략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수메르의 도시 우루크의 왕이었다. 고대 근동의 역사적 유물, 기록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연대는 참으로 경이롭다. 몇 백년 전만 해도 까마득한 선조들의 시대로 인식되는데 무려 5000년 전 이야기가 살아 남아 시대를 초월하고 있다. 수메르 인들은 중앙 아시아에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되는 신비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류 최초의 문명, 특히 문자를 남겼다. 수메르 인들의 정치적 전성기는 아주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의 문자는 지배층, 지식인들 사이의 표준어로 살아남았다. 마치 중세의 라틴어가 했던 역할을 고대의 수메르 어가 한 셈이다. 문자와 기록의 위대함을 고대 수메르의 연대에서 새삼 느꼈다. 한편, 이런 언어들을 해독해 낸 학자들의 수고와 노력에도 경의를 표한다. 영어를 수십 년간 해도 바보나 다름 없는 나에게 언어를 다루는 분들은 존경의 대상이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아 오뒷세이아에 비하면 짧은 편이다. 우루크의 젊은 왕 길가메쉬는 넘치는 힘과 젊음의 호기를 감당 못하고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러자 신들은 그의 친우로 엔키두를 탄생시켰다. 길가메쉬와 힘과 용기, 지혜에서 맞수인 그는 짐승처럼 자라났으나 신전의 여자 샴하트를 만나 문명을 배웠다. 길가메쉬와 엔키두는 처음엔 맞서 싸웠으나 곧 의기투합 하여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지가 되었다. 그들은 삼목산의 산지기 훔바바를 죽이고, 하늘의 황소를 물리쳤으며, 이웃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해서 신들과 연관된 이들과 맞서 승리하자 신들은 엔키두를 죽이는 벌을 내렸다. 친우의 죽음을 접한 길가메쉬는 슬픔에 잠겼다. 그러다가 신의 힘을 가진 이들도 물리치던 길가메쉬이지만 자신과 비슷한 역량의 엔키두가 죽자 필멸자의 숙명인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맸다. 마침내, 고대의 대홍수에도 살아 남아 영생을 누리던 우트나피쉬팀을 만나지만 인간에게 영생이란 없다는 말만 듣는다. 우트나피쉬팀의 아내가 호의를 보여줘 길가메쉬는 젊음으로 되돌려주는 가시나무를 얻지만 목욕하는 사이 뱀이 그것을 훔쳐 도망갔다. 그래서 뱀은 탈피하여 젊음을 되찾는 생명체가 되었다. 긴 여정 끝에 길가메쉬는 마침내 죽음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의 도시에서 온 시민과 신들의 보살핌 아래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서사시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우선 사람의 창조에 얽힌 이야기들은 고대 수메르 인들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생각했는지에 대해 단서를 주기 때문에 관심이 갔다. 수메르 인들은 하급 신들 대신 노동을 하기 위한 존재로 신들이 만든 존재를 인간이라고 인간의 탄생 신화에서 밝혔다. 그만큼 당시 하층민들, 농민이나 노동자들의 일이 고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노예나 하급 노동자들은 맥주를 급료로 받았다고 했다. 고된 노동을 술로 잊으라는 뜻일까. 내가 요즘 다양한 맥주를 좋아하는데 역사가 오랜 술을 알고 마시니 더 흥미롭고 맛있다. 

  최고신 및 그 아래 신들의 권력관계와 서열도 흥미진진하다. 인간을 창조한 신 엔키는 최고신 에아의 장자이지만 서자여서 적자이자 동생인 엔릴에게 서열과 최고신 계승권에서 밀린다. 저자는 엔키와 엔릴 두 신이 유대교의 신 야붸(저자는 야훼를 이렇게 표기)로 통합되면서 성경에서 보이는 모순이 드러난다고 했다. 서양 문명의 거대한 줄기인 유대교, 기독교에 대해 알기 위해 ‘구약성경개론’이란 책을 구입했는데 아직 성경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처지라 미루고만 있었다. 그런데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으며 고대 근동에 대한 호기심이 더 자라서 부족하더라도 곧 읽기 시작해야겠다. 

 그리고, 이 서사시의 가장 큰 주제는 ‘죽음’이다. 인간이라면 가지게 되는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와 이의 극복은 지금까지도 인간의 가장 중요한 삶과 윤리, 철학의 주제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인간의 악덕이 얼마나 많은가?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죽음을 넘어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헛된 욕망과 권력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내가 죽더라도 내 자손들이 번창하길 바라면서 온갖 비리와 횡포를 저지르며 재물을 축적하여 상속하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근원적 이유 중의 하나가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마음이야말로 고금의 위대한 사상가, 종교가들이 설파한 깨달음이다. 

 길가메쉬는 젊고 의기양양할 때 죽음을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죽음을 극복하는 용기를 내세워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다 친우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공포에 사로잡힌다. 자신 역시 죽어서 육신이 썪어 문드러지는 상황을 상상하게 되었다. 긴 여행과 탐험, 그리고 만남 후에서야 그는 진정으로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맞이한다. 그는 젊어서 강력한 적을 물리쳤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를 극복했기 때문에 위대한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그래서 긴긴 세월 영웅의 전범으로 추앙받아 지금까지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해 주고 있다.

 고대 근동의 세계가 워낙 역사가 길고 많은 종족과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이루어 역사적으로 한 존재에 대한 단어가 많다. 그런 부분들을 비교적 잘 정리했음에도 친근하지 않아서인지 자꾸 헷갈렸다. 그런 부분도 잘 정리해 주었으면 좋겠다. 연대는 속시원하게 잘 정리해 주었다. 구약성경 중심으로 고대 근동에 대한 공부도 꼭 해봐야겠다. 길가메쉬 서사시 책이 시작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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