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대를 가려고 마음먹기도 전인 아주 오래전 전두환 시절에 안기부로부터 고문을 당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1시간 이상 집중해서 무엇을 할 수가 없다고 했고, 그나마의 건강이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 1시간 이상의 운동, 스트레칭이 필수라고 했다. 구체적인 고문 방법이나 내용은 이야기를 들은지 오래되어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후로 오랫동안 나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고문이 가능한 이유는, 다른 감각들(시각 청각 후각 등)은 같은 자극이 계속되면 그 자극에 무디어지지만, 통증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아픔을 주는 행위는 거듭될수록 더욱 아프게 느껴진다. 만약 통증자극이 거듭될수록 무디어진다면 고문은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고문과 같은 특수상황아 아니더라도 허리나 머리의 통증이 지속된다면 통증자극에 대한 역치는 낮아지고 통증 감각의 정도는 더 강해질 것이다. 이것이 어느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중추신경계에 변형이 일어나 구조적인 원인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심한 만성통증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만성통증을 앓는 저자의 통증 일기이면서 만성통증에 대한 최신 연구성과까지 비의료인의 시각으로 담아낸 책이다. 나는 환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이 책을 읽은 후 좀더 환자 입장에서 통증에 접근해야 할 당위성과 의무감을 얻었다.  

 

 -"통증pain의 어원은 '처벌'을 뜻하는 라틴어 '포이나'poena, '갚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포이네'poine, '지옥에 떨어진 영혼이 겪어야 하는 처벌과 고통'을 뜻하는 고대 프랑스어 '펜'peine이다."

 

-"'통각'nociception은 '아프게 하다, 상처를 입히다'라는 뜻의 라틴어 '노케레'nocere와 '시작하다'를 뜻하는 어근 '-cept'가 결합한 단어다."

 

-"이브가 당한 저주 '에쩨브'etsev(상처, 통증, 힘든 수고, 고뇌, 슬픔, 고난, 버림받음, 비탄, 불행'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는 히브리어)...."

 

 이처럼 통증은 육체적 손상에 따르는 고통 뿐 아니라 정신적 불행, 처벌 등과 떼놓을 수 없는 개념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저주하고픈 상대에게 "이런 암적인 존재" 운운의 말을 한다. 이런 '은유로서의 질병'에 대해 '수전 손택'이 쓴 책도 곧 읽어야겠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은유로서의 질병 개념은 그 위력을 읽게 된다. 세균이 발견되면서 통증은 그 원인을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푸코는,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환자에게 "지내기가 어떠신가요?"라고 물으며 이야기를 이끌어내던 의사가 "어디가 아프신가요?"라고 물으며 생물학적 측면에만 치중하기 시작하면서 근대의학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업이나 도덕적 관점에서 개개인별 다르게 작동하던 질병과 통증이 특정 원인에 의해 모두에게 동등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는 곧, 권력에 의해 감옥과 학교와 더불어 개인들에 대한 통제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내가 한의사로서 주의깊게 봐야 했던 인용문과 구절들이 있어 조금 옮겨본다.

- 일레인 스캐리는 통증이 언어적 경험이 아닐 뿐 아니라 언어를 파괴하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통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그 과정에는 '나눌 수 없음'이 한몫한다. 통증을 나눌 수 없는 것은 통증이 언어에 저항하기 때문이다"라는 그녀의 말은 버지니아 울프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영어는 [햄릿]의 사상과 [리어 왕]의 비극을 표현할 수 있지만 오한과 두통은 표현할 단어가 없다..... 환자가 머릿속의 통증을 의사에게 묘사하려는 순간 언어가 깡그리 말라버린다."

-통증의 한가지 저주는 통증이 없는 사람에게 거짓말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만성 통증을 가진 환자는 의사에게 "좋아질 거라 생각하세요?"라고 묻는다. 이 물음은 의학적 질문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이다. 통증은 자아 감각을 분열시켜 두려운 나, 진짜 나, 바라는 나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의사는 세가지 나를 모두 상대해야 한다.

 

 의사는 정해진 진료지침 내에서 처치를 하거나 처방을 내려야 한다. 물론 면허를 가진 의사로서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환자에게 다른 문제가 생겼을 경우 정해진 범위 내의 진료내용이 아니면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할 수 있다. 현대와 같이 고도로 발전하고 인구가 많은 사회에서는 면허된 의사라 하더라도 많은 인구를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 진료지침 바깥의 행위를 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근현대의 의료제됴는 거칠게 말하면 권력과 자본의 입맛에 맞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의 신체를 통제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의료시장 자체도 거대 자본의 각축장이기도 하다. 제약회사들, 보험사들, 병원들, 그리고 대학들이 이전투구를 벌이는 전장이다. 이 틈바구니 속에서 의사들도 거대한 체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하게 된다. 쥐꼬리만한 권한과 전문직에게 보장되는 상대적으로 높은 급여가 그 댓가이다. 그러나 의료기술과 의료기공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의사들의 역할은 축소되고 결국은 전문직으로서의 위상을 누리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도 의사들은 진료지침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과거 자본주의 분업의 발달과 기계의 등장으로 수공업 장인들이 몰락한 것을 떠올려보면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된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의 의료인들이 만성 통증에 대해 환자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리면서 진료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현재 의료생협 한의원에서 일하고 있는 내게도 아래의 목록을 지키며 진료하기는 사실 불가능하다. 이렇게 한 명의 통증환자를 진료하면 엄청난 적자를 안기 때문이다.

 

 스탠포드 통증 클리닉에서 만든 목록
1. 환자는 무엇이 통증 원인이라고 믿는가?(암, 근육 경직 등)
2. 환자의 관점에서 본 통증의 의미(통증에서 지속적인 조직 손상을 떠올리는 것, 병에 얽힌 불길한 상상)
3. 환자의 관점에서 본 통증의 영향(사회 활동, 직장 생활, 여가 활동을 못 하게 되었는가?)
4. 환자의 목표(행복해지는 것,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것, 직장이나 학교로 돌아가는 것)
5. 환자는 무엇을 적절한 치료로 판단하는가?(환자가 다른 전문가에게 치료받고 싶어 하는지 여부를 포함하여)

 

 이 목록을 모두 지키며 진료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항상 이 목록의 내용을 떠올리며 더욱 환자의 입장에 다가서는 한의사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우리 사회가 좀 더 왼쪽으로 이동하길 간절하게 바란다.

 

통증, 만성통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