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가끔 티비에서 보면 가상으로 죽음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에서는 유언장을 작성하라고 한다던데, 그런 기사를 볼때마다 지나간 시간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떠난 후 남겨질 주변인들에게 할 말들을 생각해보면서 또 한번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의 첫페이지에 등장하는 도덕수행평가를 위해 여울이가 작성해야만 하는 자서전. 자서전 역시나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나에게도 여울이에게도... 더불어, 굳이 감춰두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드러내놓고 싶지도 않았던 것들에 대해 열어야할 때가 온 것 같다. 비루하고 챙피하고 짜증스럽지만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 한번쯤은 온다고 생각해야 할까...

우리 형제는 육남매다. 정말 '넉넉하지 못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가난하게 살았다. 배우 장미희씨가 "떡~ 사세요~" 하면서 나오던 드라마를 울면서 봤다. 그런 환경에서 형제가 이리 많으니 옷을 물려입는 것이나 아껴쓰는 것, 먹는 것도 나눠먹는 것이 기본이다. 나눠 먹는 것은 인간이 가져야 할 예의일지 모르나, 최소한 우리집에서는 지켜야할 규칙 같은거였다.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는 노래 가사는 우리에게 그냥 노래가사가 아니었다.

어느날 철이 없는 막둥이녀석이 "엄마, 우리집은 왜 이렇게 가난해?" 라고 물었을때, 누나 다섯이서 그 녀석의 머리통을 한대씩 쥐어박았다. "이런 멍청한 녀석~!!" 그 앞에서 엄마는 그냥 웃으셨지만, 그 쓰라린 속을 자식들이 알면 얼마나 알까 싶었다. 얼마 후, 엄마는 환한 얼굴로 집에 오셔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더이상 빚은 없으니 마음이 홀가분하다."라고... 요즘에도 그렇겠지만, 집에 빚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적은 금액이라도 이자를 내면서 허덕이고, 갚아야 할 빚이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편하게 주무실 날이 없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마지막 빚을 청산하고 들어오셨을 그 마음이 어땠을까... 감히 상상도 안된다.

지금도 여전히 '넉넉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자라서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리고, 부족한 형편에 그 이해심이 조금씩은 더 얹어진 느낌에 '가족'이란 이름으로 함께여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들지만, 솔직히 다시는 떠올려보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더 많다. 지나간 시간을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거라고 하지만, 그것도 어쩌다 한번, 잠깐이다. 아무리 지나간 시간을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다고 하지만,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고통인 순간도 있는 것이다. 가족에게 공유된 기억의 일부분은 그런 것도 있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 시간에는 그랬던 것 같다.

고2때 담임선생님은 '가난은 죄'라고 하셨다. 아마도 나의 반항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순간이 아니었나 모르겠다. '가난이 죄라면 당신은 얼마나 죄를 안짓고 살고 있냐'고 묻고 싶었다. '당신의 부모와 당신과 당신의 자식들은 단 한순간도 죄인이 아니었던 적이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여전히 소심한 성격에 그 많은 하고 싶은 말들은 결국 가슴 속에 묻혔지만, 단 한번도 가출하지 않고 학교에 결석하지 않고 졸업을 했을때는 나 스스로 참 대견하다는 생각도 했다. 지금 여울이가 가출을 준비하고 있고, 돈이 필요하지만 감히 자서전 수행평가를 하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이 나에게로 날아온 듯 하다.

여울이네 가족은 '가난+콩가루'집안이다. 이보다 더 불량스러울 수 없는 가족이다. '불량가족은 이런 재료로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생생하다. 장학금이 탐타지만, 돈이 필요하지만, 굳이 여울이가 그 자서전을 채우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이해될 것 같은 가족구성원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하나 기죽지 않으시고 팔팔한 잔소리를 거침없이 내뱉는 할머니가 있고, 다발경화증이라는 병으로 스물이 넘은 나이에도 기저귀를 차고 생활하는 오빠, 욕설을 포함한 거침없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날려주시는 비만덩어리 언니가 있다. 평생을 주식만 하다가 그 머릿속이 고장나서 뇌경색으로 한쪽 몸이 불편한 삼촌이 있고, 이 집안의 유일한 수입원이자 채권추심 하청 일을 하는 무식한 아빠 '불곰'이 있다. 40평대의 월세 아파트에 살면서도, 야금야금 그 보증금을 까먹고 있으면서 별다는 대책이 없다.

기본적으로 가난하고 콩가루집안인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여울이네 가족의 문제는 무엇인가.

여울이네 집에 없는 게 참 많은데 그중에서도 세가지만 꼽아보자면, 그 첫 번째는 '엄마'다. 여울이네 남매 셋은 모두 엄마가 다르다. 아이를 낳아놓고 나가버린 세명의 여자에게 엄마라는 호칭은 사라진지 오래다. 기억에도 없다. 입밖으로 꺼내서도 안되는 단어다. 여울이네 집에 없는 그 두 번째는 서로간의 배려다. 밥 먹기 위해, 집에 돈이 없기에 그저 뭉쳐 사는 것 뿐이다. 가족구성원 서로에 대한 이해나 배려로 존재하는 관계가 아니다. 그저, 그 공간에 함께 머물고 있을 뿐이다. 각자의 배고픔과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오직 그 뿐이다. 여울이네 집에 없는 그 마지막 세 번째는 주인공이다. 최소한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해야하는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도, 개인이라는 이름으로도 그들은 각자의 시간 속에서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 혹은 엑스트라로 살아간다. 각자가 그저 지나가는 '행인1'로 살아간다. 손을 부딪히지도 마주잡지도 않고 그저 스쳐지나가는, 지나가면서도 뒤돌아보지 않는...

그런 집에서 지금 여울이가 생각하는 건 단 하나다. '가출', 아니 꼼꼼하게 준비하고 후회없이 나가기 위해 '출가' 준비를 한다. 주인공의 삶을 살기 위한다는 거창한 이유도 아니다. 단지 벗어나고픈 이유 뿐이다. 그나마 그 집에서 여울이가 유일하게 견딜 수 있는 것은 코스튬플레이에 참가하는 것 뿐이다. 코스튬플레이를 하면서 다른 의상을 입고 다른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보면서 숨을 쉬는 것, 그 순간이 여울이에게는 가장 황홀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다. 의상과 악세서리로 자신을 다른 인물로 꾸미고, 다른 부분을 드러내놓지 않아도 되는 시간, 많은 것이 하자품이고 불량품인 자신의 가족들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 열 일곱의 여울이가 주인공이 되는 아주 잠깐의 시간이다. 그리고 코스튬플레이의 그 시간이 여울이에게 또 다른 생각과 또 다른 시선을 가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첫사랑이자 짝사랑의 대상인 세바스찬은 여울이에게 설레임과 두근거림을 알게 해준 시간이었고, 여울이가 변신하고자 했던 피오나공주. 피오나공주의 의상과 세바스찬슈렉의 입맞춤으로 여울이는 다시 그들만의 불량가족의 구성원으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천사복장을 하고 나타난 마리아 아줌마. 마리아 아줌마가 말해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하는 질문의 여러가지 답들을...

여울이네 가족이 순식간에 해체되었던 그 순간, 그림 한번 그리게 안해준다고 드디어 폭발한 언니가 나가고, 돈 아까워서 돌봐주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터트리고 나갔던 오빠, 무임금 노동착취라며 삼촌마저 빠져나간 그 집에서 여울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한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은 욕심이며,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 (P.104)" 라고...

지독하게 불량스러웠던 그 가족이 해체된 그 순간이 개운해야 하는데, 이상하다. 개운하지 않다. 돈 때문에 뭉치고 돈 때문에 흩어진 그 가족이 너무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뭔가가 하나 빠진 것 같다. 해체되는 것만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일거라 생각했던 그 가족에게 또 다른 위기가 온 듯 하다.

누구 하나 그냥 지나치면서 잊어버릴 수 없는 캐릭터들, 상황들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잔소리를 지독하게 해대는 여울이의 할머니는, 우리들을 이뻐해주지 않으셨던, 그래서 돌아가실때 조차 눈물 한방울 안나게 만들었던 할머니가 생각나게 한다. 아빠라는 자리에서도 가정을 책임지지 못했던 불곰은, 여전히 대화하고는 담을 쌓고 살게 만들고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살아라'하고 늘 말씀하시던 아버지가 생각나게 한다.

여울이는 여울이면서 또한 '나'다. 그리고 이미 그 시간을 달려나온 '우리'다. 여울이와 여울이네의 그 콩가루 같은 가족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하나쯤은 꼭 닮아있어서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안타까움과 미움과 슬픔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기억들이다. 그렇기에 더 간섭하고 싶고 들여다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이제 겨우 주인공이 되었을, 현실로 돌아왔을 여울이가 다시 또 암담한 어둠 같은 현실부터 맞딱드리지 않게 하고 싶은 오지랖에...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진화하는 거야(P.197)." 라고 말하던 도덕꼴통의 말에 이제 여울이가 가장이 되고 주인공이 되어 그 진화를 시작하려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주고 싶어지는 것처럼...

내용을 가슴에 새기고 보면 분명 우울한 내용인데 시종일관 유쾌하게 읽힌다. 집을 나가면서도 여울이에게 택시비를 달라던 삼촌, 실리콘덩어리 입술로 첫입맞춤을 빼앗긴 피오나공주의 모습, 끝까지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설렁탕을 사식으로 넣어달라던 아빠의 모습을 그려주는 것을 보면, 작가는 정말 울고 싶은 그 순간에도 웃음으로 만들어주는 센스를 발휘하는 것 같다. 가끔은 이들 가족이 많이 그리울 것 같다. 이들과 비슷한 상황을 볼 때, 웃고 싶을 때, 그들의 감춰진 마음들이... 잔소리 할매, 욕쟁이 언니, 기저귀 오빠, 불손바닥 불곰, 뇌경색삼촌. 결국 이들 가족이 가지고 있었던 그 외로움과 그리움이 발산되는 순간순간들이...

문학을 읽는 이유, 특히 청소년 문학을 읽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아서이다. 여전히 '주변인'으로 '행인1'로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여울이일 수도 있겠지만, 가족을 기다리면서 또 다른 의미의 가족을 알아가는, 열 일곱을 살아가는 여울이일거라는 기대를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하는 질문에 '서로 사랑하라' 는 답을 안고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