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독 더웠다. 뉴스에서 연일 떠들어대는 열대야라는 단어만 들어도, 사람 체온에 육박하는 기온의 숫자만 봐도 절로 등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뉴스의 사실성을 뒷받침하듯 이른 아침부터 일찌감치 기지개를 켠 더위는 제 세상인 양 활개를 쳤다. 해의 존재 여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인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며칠 내내 가열차게 활동했다. 바람 한 점 없는 후텁지근한 어둠 속에서 뒤척이다 잠을 설친 날이 선명하게 각인된 여름이었다.
말라 죽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날들이 환상처럼 스러져 간 후 바람이 불었다. 아직 식지 않은 열기를 옆구리에 매달고 파도처럼 밀려왔다 물러가는 바람결을 헤아리기만 하여도 숨통이 트였다. 혹독한 더위를 이겨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보너스 같은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던 날, 날씨와 어울리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더위에 치여 한동안 빛을 못 본 책의 단조롭고 깔끔한 표지 위를 비상하는 새의 날개짓이 자유로워 보였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라는 책의 제목만큼이나. 더위에서 갓 해방된 내 마음만큼이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기행문이다. 어느 곳을 언제 누구와 다녀왔으며 무엇을 하고, 어떤 것을 느꼈는지의 육하원칙에 전혀 의거하지 않는 짧은 글들이 바람처럼 가볍거나 묵직하게 혹은 습하거나 차갑게 손끝에 닿는 책이다. 책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기본적인 의무(?)인 페이지 표시마저 묵살해버린 책갈피에는 방향도 없고 앞뒤도 없다. 당연히 입구와 출구도 구분되지 않아 자칫 멀미를 유발시키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자 했던 의도에 어긋나는 책은 어느샌가 버거워져 있었다. 길지 않은 글을 눈알 빠지게 집중하여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속 시원히 이해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여느 여행 서적들처럼 네모난 프레임에 갇혀 있는, 나는 가보았으나 작가는 한 번쯤 발을 디뎠을 낯선 풍경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부질없었다. 그것들은 이미 활자로 구성된 글들과 독립된 또 하나의 글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사진은 글을 위한, 부연 설명이 아니라 글과 마찬가지로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었던 것이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바람과 파도에 밀려 망망대해를 둥둥 떠다니는 뗏목이 된 기분이었다.

  잠시라도 정신을 딴 데 팔면 순식간에 나를 맨 첫 장, 출발점으로 데려다 놓는 책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를 여러 번. 부질 없어 보이는 과정을 반복하고 난 뒤에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가 작가의 이야기에 눈을 맞추지 못하고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이유는 지독하게 사랑하고 받아본 적도, 하릴 없이 헤맨 적도, 생각 없이 훌쩍 떠나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정체된 공기 안에서 무난하게 삶을 이어온 나는 작가가 책 안에 모아 놓은 여러 종류의 바람에 훌쩍 몸을 맡기기에 너무 겁이 많고 지루한 존재였다. 하루에 몇 번씩 부는 바람도 각기 냄새가 다를 것인데 책 속을 휘젓고 다니는 수많은 바람 중 어느 것과도 겹치지 않을 정도로 단조로운 삶의 비애란. 단조롭고 지루한 시간의 마디를 비집고 서늘한 입김을 부는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집어든, 바람 부는 어느 날을 놓쳤더라면 내 삶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단조로운 소리를 내며 굴러가고 있었을 것이고 나는 여전히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지 못한 채 걸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나를 지나간
내가 지나간 세상 모든 것들에게
'잘 지내냐'고 묻고 싶어서
당신을 만난 거겠다.

 

- '묻고 싶은 게 많아서'

  더 이상 눈에 힘을 주고 방향을 더듬어 출구를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책을 읽다가,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다가 조금이라도 내 안에서 바람이 부는 기척이 느껴지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한 줄의 글에, 한 장의 사진에 눈길이 묶이는 일은 기꺼웠다. 물끄러미 응시하는 글과 사진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에 마음이 동하는 느낌이 좋았다. 바람에 휩싸여 멀미가 나도 이제는 괜찮다. 이 책은 그러기 위해서 만들어졌을 테니까.
책에서 부는 바람을 모두 붙잡지는 못했지만 아직 닿지 않은 바람이 남아 있기에 홀가분한 외로움이 묻어나는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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