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조용한 에이번리 마을 외곽에 초록 지붕 집이 있다. 시끌벅적한 일도, 생동감 넘치는 일도 생기지 않는 초록 지붕 집에 사는 나이든 커스버트 남매는 일꾼으로 키울 남자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실수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남자 아이 대신 빨간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완벽하게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하는 여자 아이가 그들의 인생 안으로 들어오고 초록 지붕 집의 기나긴 침묵에 노크를 한다. 코딜리어라고 불리기를, 그럴 수 없다면 이름 끝에 'e'를 붙여주길 간절히 원하는 여자 아이의 이름은 앤 셜리. 이 집 저 집에서 보모로 지내다 고아원으로 보내진 참이었다. 어른들이 보기에 노새처럼 고집불통인데다 엉뚱하다 못해 황당한 상상들을 즐겨하는 앤이 오던 날부터 조용하던 에이번리에는 앤이 일으킨 잔잔한 파문이 퍼져가기 시작한다.

  예전에 만화영화로 줄기차게 봤던 <빨간 머리 앤>을 기억 속에서 되살려 가며 읽는 동안 입술 새로 노래가 절로 나왔다. 만화영화를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어렴풋이 기억날 주제가는 초록 지붕 집에서 앤이 펼치는좌충우돌 일상과 감각적이고 사랑스러운 일러스트가 어우러진 <빨간 머리 앤> 책과도 상당히 잘 어울렸고 책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간 머리 앤, 외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자라.

  내가 본 앤의 첫인상은 시끄럽고, 말 많고 지나친 공상으로 현실과 상상을 구별 못하는 꼬마 아이였다. 앤의 황당한 상상과 입을 막기 전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말과 엉뚱한 행동을 이해하기가 그래서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질문 하나를 던지면 흐르는 시냇물처럼 쉬지 않고 떠드는 건 기본이고(앤 혼자 떠드는 말이 한 페이지를 채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자기가 펼치는 상상에 빠져 사느라 마릴라 아주머니가 시킨 일을 까먹거나 엉뚱한 짓을 하기 일쑤고 지나치게 과장된 행동과 감정을 보이는 앤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앤이 무슨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예의주시하는 마릴라 아주머니의 심정이 백 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하지만 마릴라 아주머니가 되어 앤이 하는 말과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더니 앤은 마냥 시끄럽게 떠들기나 하는 허영심 많은 여자 아이가 아니었다. 무너진 선입견 너머에서 잿빛 눈을 반짝이는 앤은 그저 아프고 힘들었던 시절을 보듬기 위해 상상을 하고, 온몸으로 진심을 다해 세상과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랑스럽고 상큼발랄한 여자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으키는 소동과 사건들은 조용한 에이번리를 떠들썩하게 하고, 무료하던 내 생활을 들썩이게 했다. 요런 맹랑한 아이 같으니라고.

"넌 무슨 일에나 그렇게 열을 내는구나, 앤. 앞으로 살면서 실망할 일이 얼마나 많을지 걱정이구나."
"어머, 어떤 일이든 기대하는 데 그 즐거움의 반이 있는 걸요. 혹시 일이 잘못된다 해도 기대하는 동안의 기쁨은 누구도 뺏을 수 없는 거예요. 물론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실망할 일도 없으니 다행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전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쪽이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 '13. 즐거운 기대'

  기쁨과 행복, 절망과 슬픔의 크기를 남들보다 세 배쯤 더 크게 느끼는 앤의 예민하고 섬세한 영혼이 세상 풍파에 시달리며 훼손될까봐 걱정하는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앤이 당당하게 내민 대답에서 내가 좀처럼 앤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유를 알아냈다. 책 속의 앤보다 20년 가까이 더 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앤보다는 마릴라 아주머니에 가까워져 버린 것이었다.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는 일이 줄어들고, 가슴보다 머리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꿈과 환상에 젖지 않기 위해 현실에 시선을 못박아 두려 애쓰는 어른으로 굳어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글프게나마 인정하고 나니 앤에게 쳤던 선입견의 벽이 서서히 무너지면서 여전히 말이 많고 엉뚱하긴 해도 생기 넘치는 상큼발랄한 마음이 사랑스러운 앤의 새로운 모습이 보였다.

  <빨간 머리 앤>을 읽다 보면 앤처럼 상상을 해야 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마치 앤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처럼 말이다. 그냥 글자만 읽어도 좋을 테지만 초록 지붕 집과 에이번리의 사계절 정경은 가지고 있는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 천천히 그림을 그려나가듯 읽어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색다르게 변하는 에이번리의 풍경을 아름답고 상세하게 묘사한 구절을 읽으면 생소한 이름을 가진 나무와 꽃이 내뿜는 생명의 향기와 기운이 눈앞에 그려지고 절로 미소를 띠게 만든다. 앤의 일상 뿐만 아니라 자연까지 아름답게 표현해낸 작가의 글솜씨에 감탄할 따름이고 다 옮겨 적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사랑해주던 수더분한 농부 매슈 아저씨의 죽음으로 곧게 뻗어 있는 미래가 구불구불해졌을지언정 좌절하지 않고 구부러진 길모퉁이에서 무엇을 만날지 흥분되고 기대된다는 앤의 말에 나는 앤이 이제껏 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당하고 열정적인 자세로 자신의 앞에 펼쳐진 길을 한 발짝씩 걸어나갈 것임을 짐작했다. 앤이라면 길모퉁이에서 맞딱드리는 것이 설령 절망의 구렁텅이라 해도 개의치 않고 콧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게 바로 배리 할머니가 앤을 두고 말했던 "사랑이 우러나게 하는 사람"의 진면목일 테니 말이다.

젊음이라는 희망의 황금 실로 행복한 미래의 꿈을 엮었다.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릴 장밋빛 날들은 모두 앤의 것이었고, 한 해 한 해가 희망의 장미로 피어나 영원히 시들지 않을 화관으로 엮어질 터였다.

 

- '34. 퀸스의 여학생'

  마냥 철 없는 아이에서 차분하고 생각이 깊어진 소녀로 거듭 자라난 앤이 평생 미워하기로 다짐했던 길버트와 화해하는 걸로 책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에이번리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 속에서 뛰놀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빨간 머리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와 가벼운 발소리는 오래도록 남아 더 이상 어린 아이로 되돌아갈 수 없는 내 가슴을 빗방울처럼 두드렸다. 낭만적이고 거창한 표현을 잔뜩 섞어 청산유수로 재잘거리는 앤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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