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인생의 좌우명인 양 떠받들며 살았었다. 세상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제조일자일 뿐인 호적상의 생년월일 따위 가뿐하게 무시하고 내가 만들고 싶은 대로 인생을 꾸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두 주먹 쥐고 파이팅을 외쳤던 그 때, 나는 어렸고 그만큼 힘이 넘쳤다. 불과 몇 년 전의 화이팅을 서글프다 못해 서럽게 받아들이는 올해를 기점으로 서른에 돌입한 내가 부러워할 만큼 말이다. 열아홉에서 스물로,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갈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위기감을 서른의 3분의 1이 지난 시점에서야 뒤늦게 감지한 서른 살의 어른에게 나이는 더 이상 무시하고 깔봐도 되는 만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특히, '서른'은 더더욱.
  예쁜 옷이나 구두, 헤어스타일을 의논하던 친구들이 어느 새 '아내', '엄마', '며느리'라는 타이틀을 꿰어차고 물가 인상과 남편 월급의 상관관계라든지 자식들의 성적 걱정 하는 걸 보거나 몇 안 남은 솔로 친구들이 결혼한 친구들처럼 화려한 타이틀만 달지 않았을 뿐 저마다의 고민을 안고 만날 때마다 불러주는 애국가보다 길고 긴 하소연을 듣고 있자면 절로 인생무상이니, 달도 차면 기우나니 따위의 체념 어린 장탄식을 하게 된다. 누가 꽃 같은 우리를 이렇게 후줄근하게 만들었냐며 화를 내다가도 금세 꼬리를 내리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니까.
이렇듯 하소연→성질→체념을 반복하고 나면 친구들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친 얼굴로 서로에게 묻는다.

우리 잘 살고 있는 거니? 행복해질 수 있을까?

  스물아홉까지 무작정 시간을 소비하는 데 주력했다면 서른부터는 좀 더 계획적으로 잘 사용하여 인생의 만족도 즉 행복의 빈도를 높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서른이 되고 보니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진 탓이다. 다짐한 것까지는 참 좋았다. 방법도 모르면서 무조건 행복해질 거라 다짐한 나 자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래, 결심했어!'라고 간만에 주먹 불끈 쥔 건 기특한데 '근데 어떻게?'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란 내가 봐도 웃겼다. 인생 헛살았다 싶은 순간 책 한 권에 꽂혔다. 제목에 들어간 '서른'이란 단어를 죽어라 째려보다 눈이 아파서 잠자코 책장을 넘겼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아니었다면 과감하게 치웠을지도 모르겠다. 관대한 것처럼 보여도 은근히 '서른'이란 단어에 민감한 편이니 말이다.

 

  <서른엔 행복해지기로 했다>는 나와 비슷한 물음표를 매달고 하루하루를 꾸려가는 작가 본인의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내 또래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책이다. 독립으로 시작해서 젊은 마음 유지하기로 끝나는 이 책에는 작가의 생활상이 말갛게 드러나 있는데 읽는 동안 내 입에는 '어머, 맞아!', '그래, 나랑 비슷하네!' 등의 감탄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아, 서른 진입 전이거나 서른이거나 혹은 넘은 여자들의 생활은 나이 차이에 상관 없이 공감대 형성 가능한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행복해질 거라 서둘러 결론내지 않는다. 다만, 직접 겪은 소소한 일상들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결국 그녀와 내가 언제든 넘어지고 부딪치고 상처 받는 비슷한 존재임을 은연 중에 깨닫게 한다. 유유상종을 만나면 으레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법.

나만 물음표를 달고 사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과 그래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위안을 동시에 선사하는 <서른엔 행복해지기로 했다>는 배울 점보다 공감할 수 있어서 좋은 책이다.

어른의 삶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공생하는 생활이라는 걸 실감한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의무와 책임 또는 강제에 가장 최선의 방식으로 대처해야 하는 사람, 하고 싶은 건 많으나 하지 못하는 상황에 익숙해져야 하는 존재.

 

- '참을 수 없는 집안일의 버거움'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작가의 독립기는 내가 상상한 독립이 얼마나 공주풍의 허무맹랑한 환상이었는지 철저하게 해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른 전부터 엄마가 투하하는 결혼 잔소리가 싫어서, 동생이랑 둘이 쓰는 복작복작한 방 말고 오로지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는 이유로 막연히 독립을 꿈꿨는데 그녀가 말하는 독립은 엄연한 현실이었던 것. 엄마의 잔소리가 싫고 동생이랑 부대끼는 것도 싫고 시끄러운 곳에서 책 읽는 것도 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버티면서 책 속의 구절처럼 '지금, 여기서' 행복해지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사이좋게 공생하는 법을 터득해가면서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 늘 연구하는 좀 더 유연한 어른, 그게 내가 꿈꾸는 진짜 어른이다.

  거울을 보면 보고 싶지 않아도 작년보다 더 늘어난 눈가의 주름과 칙칙해진 피부와 조우하게 된다. 탱탱하게 물 오른 피부만 믿고 화장을 모르고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 정녕 이것이 내 얼굴이란 말입니까! 거울을 깨부수고 싶은 충동을 삭히며 화장대를 살피니 언제부터인가 화장품의 갯수가 묘하게 늘었다. 그러고 보니 화장 시간도 좀 길어졌다. 더 슬픈 사실은 아마 앞으로 계속 화장품 종류가 늘어나고 시간도 길어질 거라는 거다. '그럼에도' 나는 거울 속의 얼굴이 현재 내 모습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작가가 프롤로그에 쓴 구절처럼 내가 나임을 창피해하지 않고 어찌됐든 이게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것이다. 늘어나는 주름과 칙칙한 피부에 대고 간혹 울분을 토할지라도 스스로를 책임지는 당당한 서른이 되련다.

 

왜냐하면 나는 행복해지기로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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