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보면 내 심경이나 처지를 120% 대변해주는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와 박힐 때가 있다. 작가가 글쓰다 말고 작두를 탔을 리 없건만 마치 보고 쓴 것 마냥 나를 쏙 빼닮은 문장을 만나면 애정도가 미친 듯이 상승함은 물론이요, 일약 '나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르며 신분 상승의 기회를 거머쥔다. 책을 좋아한다고 해도 음식보다 책 편식이 더 심한 편이라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려운데 간만에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만한 책을 찾았다. "이건 내 이야기야!"라고 심각한 착각을 하게끔 만든 책 겉표지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책장을 펼치기도 전에 매료된 나는 제목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무릇 책이든 사람이든 이름은 잘 짓고 볼 일이다.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는 책과 그림의 어울림이다. 작가는 책과 그림을 하나로 연결하여 사람을 말하고, 인생을 이야기했다. 나도 책과 그림을 많이 좋아하는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는데 별개로 감상할 줄만 알지 작가가 그랬듯 하나로 엮어 응용(!)하는 단계에 이르려면 한참 먼 듯하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책과 그림이 한데 엮여서 새로운 울림으로 탄생할 때마다 작가의 관점에 연신 감탄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탄생한 시대와 장소가 다른 각각의 글과 그림을 연결하여 생각하는 일은 두 가지 요소 모두에게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본 사람이기에 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에서 반가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편애 모드로 즐겨 읽은 부분은 한국 문학과 동화책이었다. 몇 학년 교과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국어 교과서에 황순원의 '소나기'가 실렸었다. 공부는 싫어도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글 읽기를 좋아하는 단발머리 여학생을 확 사로잡은 황순원의 '소나기'는 단편 소설이라는 부담 없는 길이와 시골 소년과 도시 소녀의 짧고 애틋한 만남이라는 풋풋한 소재가 싱그러운 풀냄새처럼 폴폴 날리는 글이었다. 첫사랑을 모르는여학생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소설을 지금의 나이에서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작가처럼 '보랏빛=죽음의 암시'라든지 '잔망스럽다'의 뜻을 외우던 여학생일 때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와서 소설 자체가 새롭기까지 했다. '소나기'에 멋대로 붙인 배경음악도 생각났다.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라는 제목이었는데 '소나기'처럼 애잔한 노랫말이 인상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작가에게 조동진의 '제비꽃'과 '소나기'가 한 묶음이라면 나에게는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와 '소나기'가 한 묶음인 셈이다. 오랜만에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를 찾아 듣고 싶어졌다. 이 노래라면 첫사랑에 대한 설렘을 잊어버리고 포기한 나의 무미한 현재를 가만가만 애도해줄 것 같다.

나이 든 남자의 첫 연애 상대가 되는 것은 부담스럽다. 소년의 첫사랑으로 기억되는 것은 영광스럽다. 누군가에게 첫사랑의 추억으로 남기에는 이젠 너무 나이가 들어버린 나는「제비꽃」의 중간 부분을 흥얼거리며 잠시 무미(無味)했던 내 소녀 시절을 애도했다.

 

-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소나기'

 

  학창 시절을 끄집어내는 글은 책의 끄트머리에서 또 하나 나왔다. 바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다.
비록 작가는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앞에 내세웠으나 나는 중간에 끼워진 '별 헤는 밤'이 더 반가웠다. 컴퓨터 시간에 타자 속도를 늘리기 위해 열심히 쳤던 '한컴타자연습'의 여러 단계 중에 긴글 연습이 있는데 몇 가지 긴 글 중에는 '별 헤는 밤'도 있었다. 유명한 시인 줄 모르고 나열된 단어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즐겨 연습했던 '별 헤는 밤'을 다시 찾아서 단어 하나하나 꼭꼭 짚어가며 읽으니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게 아닌가. 비록 작가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그림을 연결했지만 내가 보기에 고흐의 그림은 '별 헤는 밤'에 나오는 하나하나의 별과 더 잘 어울린다.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을 하나씩 담고 있는 별빛은 고흐의 그림처럼 밤하늘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지 않을까. 앞으로 '별 헤는 밤'을 읽으면 책 표지마냥 '별이 빛나는 밤에'가 떠오를 것 같다. 시와 그림의 하모니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부분이다.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기 마련"이라는 구절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을 주는 것만 같아서 좋았다.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종종 '나는 지금 구부러진 길모퉁이를 지나고 있는 거야. 앤처럼 말이야' 하고 생각했다.

 

- '이 소녀를 나는 마음을 다해 사랑했네, 빨강머리 앤.'

 

  양갈래로 땋은 빨강머리가 등 뒤에서 나풀거리는 앤의 하얗고 주근깨투성이 얼굴에 박힌 두 눈이 맑은 하늘을 닮아서 주인공이 예쁘지도 않은데 참 착실하게 챙겨봤던 만화였다. 입양된 집으로 가는 첫 날, 마차를 타고 가는 앤을 일렬로 늘어서서 맞이하던 사과나무(가 맞는지 확실하진 않다) 길은 유일하게 기억하는 장면이다. 유독 그 장면 하나만 또렷하게 남아 있어서 '빨강머리 앤'과 연결된 그림이 가로수가 일렬로 늘어선 풍경화이길 내심 바랐었다. 내 바람과 달리 작가가 고른 그림은 눈에 멍을 달고서도 씩씩하게 앉아 있는 소녀를 그린 노먼 록웰의 '눈에 멍이 든 소녀'이다. 글과 그림의 조합이 좀 아쉽긴 해도 그림 속 소녀의 당차고 어디서도 기죽지 않는 씩씩한 모습이 내가 아는 앤과 꼭 닮아서 읽는 내내 유쾌했고 더불어 길을 걷다 모퉁이를 만나도 콧노래를 부를 '빨강머리 앤'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이 아가씨와는 조만간 책을 사서 제대로 만날 예정이다)

  제목을 보자마자 첫 눈에 반한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는 어렸을 적 향수를 데리고 와서 애틋한 만남을 갖게 해주었다. 동시에 멋진 책과 아름다운 그림을 잔뜩 알려준 고마운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도 내가 읽은 책과 내가 본 그림을 하나씩 맞춰가며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졌다. 나로 인해 하나가 된 글과 그림은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태어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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