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많아서 밤 10시만 되면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나에게도 불면의 밤이 종종 찾아오곤 한다. 친구에게 들은 모진 소리를 삭히지 못하고 누운 날, 온종일 스스로를 못살게 굴고 나서 상처 받은 모습을 들키기 싫어 이불을 뒤집어쓰던 날, 가파르게 상승하는 물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월급 명세서를 보고 막막해져 울화가 치미는 날,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려 편지지를 꺼내다가도 방을 같이 쓰는 동생의 성화에 못 이겨 도로 집어넣고 모로 눕던 날 등. 생각이 많아질수록, 속내를 드러내지 않을수록 찾아오는 횟수가 잦아진 불면의 밤은 혹독하게 춥고 외롭다.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져서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어둠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몰래 눈물을 찔끔거리거나 들썩이는 생각과 감정을 억지로 누르는 일 뿐이다.
지금은 제법 불면의 밤에 익숙해져서 - 날 찾는 횟수를 줄인다면 훨씬 고마울 텐데 - 세상 끝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사람 마냥 청승맞게 베갯잇을 적신다던지 나를 못 살게 구는 사람을 향한 복수심에 뿌득뿌득 이를 갈지는 않는다. 그래봤자 수면 부족으로 피곤한 사람은 나고, 신경성 두통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나이므로 온유하면서 확실한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불면의 밤이 찾아오면 나는 행복한 상상 속으로 나를 초대한다. 나만의 책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책장이 벽을 따라 우뚝 서 있는 서재의 달빛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창가에 아담하고 편안한 소파를 갖다 놓고 고심 끝에 고른 책의 책장을 따뜻한 차를 마시며 한 장 한 장 넘기는 상상.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책 읽는 것 밖에 없는 나에게 딱 맞는 피로회복제 같은 상상을 하다 보면 불면의 밤 속에서도 웃으면서 잠들 수 있다.

  내가 상상으로 밖에 못 이룬 꿈을 현실에서 일상적으로 해온 여자가 여기 있다. 미치도록 부러운 나머지 질투심으로 내 눈을 멀게 만든 여자는 잠을 홀라당 빼앗긴 불면의 밤이 오면 자신만의 공간에 놓인 침대에서 책을 읽으며 고단한 하루를 정리하고 심란한 마음을 달랜다고 한다. 기분에 따라, 책의 장르에 따라 각종 차와 술(!)이 옆자리를 지켜주는 것도 부럽거늘 혼자 즐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불면의 밤에 읽은 책들을 남들에게 추천까지 해주는 오지랖으로 책까지 냈다 하니 이쯤 되면 넘을 수 없는 벽이나 다름없다. 이런 혼자 잘난 여자 같으니라고.
고전부터 베스트셀러, 시집, 현대소설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어서 오지랖의 폭이 태평양처럼 넓디넓은 여자의 책 <달빛책방>에는 그간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했던 불면의 밤을 위한 적절한 처방전이 가득 담겨 있었다. 본문을 접하기도 전에 맞닥뜨린 작가의 말에서 난 이미 말 잘 듣는 환자가 되어 있었다. 아아- 커피 내리는 소리처럼 편안하게 책장 넘어가는 소리로 지새우는 황홀한 밤이라니 상상만 해도 좋다. 이런 밤을 아는 여자는 어쩐지 지적인 섹시미를 풍길 것 같다.

책장 옆에 있는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다가 서서히 잠드는 밤을 상상해보자. 커피 내리는 소리처럼 편안한 책 넘기는 소리에 스르르 잠들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도 '썩 괜찮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작가의 말' 중에서

  갈 곳도 없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는데 잠 못 이루는 밤의 시간만 넘쳐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픈 <달빛책방>은 실연극복, 간접일탈, 감정유발, 취중가능, 피로회복, 진리탐구라는 6개의 불면의 밤에 안성맞춤인 책들이 제자리에 진열되어 있다.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녀에게 책은 실연 극복을 위한 진정제도 되고, 취하고 싶을 때 곁들이는 안주도 되고, 피로회복제도 되고, 세상을 새롭게 보고 싶을 때 끼는 안경도 된다. 나도 책을 참 좋아한다고 자부하지만 <달빛책방>의 그녀처럼 책을 다양하게 써먹는(!) 고수를 만날 때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잠 못 드는 밤을 위한 독서 처방전이란 부제가 붙어 있긴 하지만 딱히 밤에 읽지 않아도 상관 없는 책들도 여럿 끼워져 있다. '책 읽기 싫은 날 읽는 책'(책 읽기 싫은 날도 책으로 풀어야 한다는 그녀는 진정한 책벌레!), '자신이 하찮게 느껴질 때', '살짝 미쳐도 괜찮아' 등의 꼭지는 밤과 상관없고 오히려 낮에 읽어도 손색 없는 책을 소개하고 있으니 기분 따라 취향 따라 골라잡기만 하면 된다. 마치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는 모 회사의 아이스크림처럼 말이다.

즐거움을 누리는 일을 숙제나 대규모의 과학 박람회 프로젝트처럼 억지로라도 챙기고 싶다. 그 동안 너무 열심히 일만 하고 살았다.

-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법' 중에서

  이제는 불면의 밤이 찾아와도 웃으며 반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불면의 밤이라면 일주일에 하루는 나도 두 팔 벌려 환영하련다. 일주일에 하루는 너무 많으니까..보름에 한 번이면 좋겠다. 아직 혼자만의 공간이 없어서 그녀의 처방전에 맞는 책을 읽으며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일은 당장 불가능하겠지만 내가 상상으로만 하던 일이 누군가에겐 현실이라는 점에서 안심하고 희망을 갖기로 했다. 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없으니까. 언젠가는 나만의 공간에서 불면의 밤의 손을 끌고 들어와 옆에 앉혀두고 커피 내리는 소리처럼 편안해지는 책 넘기는 소리에 위로 받으며 스르르 잠이 드는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되면 불면의 밤도 내겐 즐거움을 누리는 또 하나의 황홀한 순간으로 피어날지니.

  오늘도 북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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