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섬을 떠돈 자에게 바다 냄새는 환각과 같다. 

때때로 끈적끈적하고 뭉개진 듯해서 만져질 것만 같은 이 냄새에 취해 나는 무던히도 배를 탔다. 
생각해보면 바다 냄새는 단순히 바다에서 나는 것만이 아니었다. 
갑판에 칠이 벗겨진 오래된 페인트 냄새며, 섬사람들의 살냄새와 차도선 바닥의 착 달라붙은 생선 비린내 따위가 
적당히 버무려진 야릇한 냄새가 바로 바다 냄새였다. 
그리고 이 냄새는 종종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골방까지 따라 들어와 불쑥불쑥 나의 후각을 자극하곤 했다. 
어떤 날은 신발장에 고이 넣어둔 신발에서 그 냄새가 났고,
카메라 가방 속의 렌즈 후드에서도 그 냄새가 났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또 나는 섬으로 가기 위해 짐을 꾸리곤 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나의 섬 여행도 잦아졌다. 
희한하게도 봄이 되면 나는 청산도를 찾아가곤 했다. 
그러니까 이번이 다섯 번째 청산도행이다. 
역시나 봄이다.
‘본다’고 봄이라 했으니, 
도청리 포구에 서서 혹은 당리 언덕에 앉아 나는 또 청산도의 봄을 본다.
봄 바다는 깊고 그윽하게 청산도의 에움진 해안선을 감싼다. 
언덕에서 뻗어나간 길들은 시냇물을 닮아서 논과 밭의 유연한 굴곡 사이로 꿈결처럼 흘러간다. 
그 길을 따라가면 이제 막 물을 대기 시작한 다랑논에도 닿고, 
해풍에 노란 머리칼을 날리는 유채밭에도 닿을 수 있다. 
돌담길 보리밭에는 보리를 베는 노부부의 낫질이 삼삼하다. 
낫질을 할 때마다 황금빛 보릿단이 뭉텅뭉텅 잘려나간다.

이 봄에 뭍에서 온 여행자 몇 명은 영화 <서편제>를 재연하듯 황토 돌담길을 따라가며 진도아리랑을 흥얼거린다.
영화에서 유봉 일가가 걸어간 바로 그 길이다. 
길 끝에 보이는 동화 같은 집은 드라마 <봄의 왈츠>를 찍었던 세트장이다. 
네 번째 청산도 여행을 왔을 때, 때마침 섬에서는 <봄의 왈츠>를 촬영하는 중이었다. 
사실 <봄의 왈츠>를 촬영하기 전에 나는 드라마의 연출을 맡은 윤석호 PD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내게 청산도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왔고, 아는 대로 나는 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이 드라마에 얼마나 보탬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청산도는 올 때마다 그 느낌이 달랐다.
딱 한번 여름에 온 것을 제외하면, 네 번이나 봄에만 청산도를 찾은 셈인데, 그 때마다 봄빛이 달랐다. 
어떤 봄은 보리밭이 유난히 아름다웠고, 어떤 봄은 막 돋아난 초록의 생기 속에서 유채꽃이 두드러졌다. 
들판의 자운영이 고왔던 봄이 있었는가 하면, 물 댄 다랑논 굴곡에 반한 봄도 있었다.
이래저래 청산도는 올 때마다 좋았고, 사방 어디를 봐도 좋았다. 
예부터 완도에서는 청산도를 ‘선산’이라 하여 신선의 섬으로 불렀고,
‘청산여수’라 하여 청산도와 여서도의 빼어난 경치를 칭송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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