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거리는 없지만 그래서 읽어낼 수 있는 게 많은 책이다. 글자가 한 자도 없고 오롯이 짧은 순간의 그림들이 연사처럼 펼쳐진다. 그게 또 친절하지도 않다. 한 페이지만 쳐다보고 있으면 이게 도통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없다. 이게 사람인지, 사물인지 또는 공간의 한 부분인지 알 수 없다. 그 다음페이지로 과감히 넘어가고 그렇게 계속 넘어가다 보면 작가가 보고 있는 그 순간이 들어온다. ‘아……!’하는 느낌표와 함께. 그럼 책의 첫 페이지로 돌아가 몇 전이나 다시 그 순간을 넘기게 된다. 그림들은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사람이든 사물이든 하나를 제대로 보려면 그 부분만 쳐다보며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마치 놀이를 하는 것처럼 그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게 된다.

 

책을 읽는 방법이나 그림을 보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면 그 방법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그동안 보아온 많은 것들이 사실은 나에게 별다른 감정을 전달하지 못한 채 그저 흘려 보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실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가 경험한 것들이 오롯이 들어왔을 때, 내 안에 흔적을 남기거나 기억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그 외의 것들은 내 경험이라고 하기엔 부끄러울만큼 기억도 없고 인상도 없다.

 

경험이라는 건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 감정을 나누는 일이다. 익숙한 감정이든, 새로운 감정이든 무언가를 통해 내 안의 감정이 일었다면 무언가 변한 것이다. 요즘 이런저런 생각들로 속이 시끄러웠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림 안에서 나의 여러 심경을 읽어냈다. 나의 일상이기도 한 그림 속에서 나는 평소에 어떤 생각으로 해왔는지 기억해냈다. 그게 참 좋은 것들이 아니어서 조금 반성을 하기도 하고. 작은 판형의 책 3권은 각각의 시간이 갖는 일상을 담아낸다. 아침이라는 시간 동안 벌어지는 뻔한 과정이지만 그 때의 온도와 적막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은 앞에서 뒤로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뒤에서 앞으로 보는 것도 또 다른 일상을 그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