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허구의 삶을 그려내지만 결국 우리는 그 속에서 자신의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게 된다. 내가 속하지 않은 세상에서 ‘내 얘기 같지 않은’사건들이지만 그들이 느끼는 감정에 공감하고 함께 공유하며 ‘인간’ 본연의 얼굴을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영화는 보이지 않는 시간과 내면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펼쳐주는 마음의 지도임을’ 깨달으며 총 53편의 영화를 통해 삶의 속성을 얘기한다. 책은 줄거리를 살짝 훑어가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인물 설정 안에 담긴 메시지나 상황이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들을 짚어보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에 영화를 보기 전보다는 보고 난 후에 읽으면 작가가 하려는 말의 의도를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여행 프로를 볼 때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이 소개되어도 내 경험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곧 지루함이 느껴지지만 내가 가보고 온 곳이 여행 프로에 소개되면 잘 아는 사람을 TV에서 보는 듯한 기분으로 내 경험을 끄집어내어 생각하고 추억할 수 있게 된다.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저자가 소개한 영화들 중에 끌리는 작품을 한 편 골라 감상한 후에 책을 한 번 더 읽으면 내가 읽어내지 못 했던 감독의 메시지를 알아채고 거기의 의미를 붙이는 경험이 더해진다.

 

어찌 보면 우리 삶에서 낯설고 새로운 건 없다. <러브 토크>의 주인공들도 자유롭게 살기 위해 낯선 곳으로 도피했으나 뒤돌아보니 지난 삶의 흔적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다시 ‘실연’했던 곳으로 돌아가 ‘실수’를 하면서 ‘실질적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남고자 한다. (16쪽)

 

저자가 소개한 영화들 중 내가 본 작품은 각각의 파트에서 한 두 편으로 좁혀진다. 하지만 그 한 두 편의 영화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작품들인지라 작가가 엄선한 작품들에도 깊은 신뢰가 간다. 영화의 매력은 보면 볼수록 보고 싶은 작품들이 늘어나고 같은 영화를 두 번, 세 번 볼 때의 느낌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영화라는 장르 안에서도 애니메이션을 아이들을 위한 단순 오락 영화로 치부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게는 몇 번을 봐도 그 안에 숨겨진 메시지가 다르게 다가오는 작품으로 애니메이션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15살에 봤던 영화를 22살 때 봤을 때 ‘아, 이런 메시지가 숨어있었구나’싶은 생각이 스칠 때면 살아간 시간이 두텁게 쌓일수록 상황과 인물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훨씬 다각도로 풍성해짐을 스스로가 느끼게 된다. 이십 대 후반이 될수록 나이를 먹는 게 슬퍼지는 하루하루지만 이런 순간만큼은 나이를 먹는 일에 작은 기쁨을 느낀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사람의 삶과 사랑은 원래 그렇게 진부하고 통속적이다.

세상을 벗어나는 건 사람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53쪽)

 

나에게 영화를 ‘찾아보는’ 행복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현재 극장에서 상영하는 오락성과 흥미 위주의 최신작들은 가볍게 즐기기에는 좋지만, 정말 보고 싶은 작품들은 다양성 영화만을 따로 상영하는 작은 극장에서 보는 사람도 몇 되지 않는 비어있는 공간 속에서 깊은 사유의 시간을 선사한다. 특히 혼자 영화를 보고 온 날은 영화가 나에게 준 느낌들을 오래도록 음미하고 생각해보며 내 식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또한 즐겁게 다가온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부터 개봉 시기를 놓쳐 극장에서 보지 못한 작품까지 봐야 할 영화들이 끝없이 리스트를 채우고 있어 남아있는 기쁨들이 때로는 일상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특히 요즘에는 시간이 지난 뒤에 작품성을 인정받아 뒤늦게 재개봉을 하는 경우도 많아서 정말 좋아하고 아끼는 작품을 대형 스크린으로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종종 맛볼 수 있다. 되돌아보니 영화는 지루한 내 일상 곳곳에서 재미와 기쁨을 더해주고 있었다. 영화를 해석하고 의미를 지어내는 일에서 저자의 깊은 통찰과 함께 삶과 인간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엿보게 되니, 영화가 주는 ‘그럼에도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작은 용기가 떠올려진다.

 

우린 그렇게 다들 유한한 시간 속에 살아갈 사람들이다.

그 시간을 채우는 건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뿐임을, 또 이렇게 알게 된다. (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