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학습 여행자의 경주 이야기’라는 부제가 딱 걸맞은 책이다.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혔듯 여행 가이드 책보다는 여행 보고서 형식으로 봐도 무방하리만치 여행 정보보다는 각각의 장소에 담겨있는 역사적 배경과 지식이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져있다. 경주라는 도시는 누구에게나 초등학교 수학여행이라는 보편적 경험으로 연결되어 가봤다는 인식을 준다. 하지만 문화재나 역사에 대한 관심은 뒷전이고 친구와 놀기에 바빴던 시절에 다녀온 경주는 제대로 보고 기억하는 것들 없이 대개 희미한 이미지로만 남아있다. 나에게도 경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불국사 아니면 석굴암에 대한 짧은 기억이 전부이다. 분명 갔다 온 곳이지만 가봤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경주를, 그래서 작년 무더위가 찾아들기 전 6월에 친구와 3박 4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내가 여행할 당시에는 주로 걸어서 이동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차로만 갈 수 있는 곳은 제외해서 그런지 저자의 소개 목록은 생소한 곳이 많이 보인다.

 

중요한 것은 변화한다는 것에 있다. 지금의 나와 이전의 내가 달라졌음을 알게 되는 순간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한다. 3백 미터 높이의 산을 올랐을 때와 9백 미터 높이의 산을 올랐을 때 볼 수 있는

풍경은 다르다. 변화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진리는 오직 자유 속에서 탐구할 수 있다.

억압받지 않는 무한개방의 사유 속에서 눈을 밝히는 명안수를 찾아 나서는 긴 여행을 시작해야 하리. (36쪽)

 

삼국을 통일하고 불교문화를 꽃피운 신라시대의 화려한 역사를 자랑하듯 경주 곳곳에는 숨겨진 유적지가 너무 많아 처음 보고, 듣는 곳이 많았다.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왕릉뿐만 아니라 다양한 석탑들이 어딜 가나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곳은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황룡사지다. 그곳을 찾아가는 일은 쉽지만 보이지 않기에 조금 당황스럽다. 분황사 앞 넓은 들판을 향해 ‘황룡사지터’라는 팻말이 꽂혀있다. 시야를 가리는 것 없는 넓은 들판에 있었을 황룡사 9층 목탑의 모습은 어땠을지 상상하게 된다.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 보면 군데군데 돌 받침이 그곳에 무언가 세워져 있었다는 흔적을 나타낸다.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의 침입으로 전부 불에 타 없어지고 터로서만 존재하는 곳이다. 그나마 위안되는 것은 앞으로 시간을 들여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작업에 들어간다고 하니 어서 빨리 그 모습이 보고 싶어진다.

 

세상에는 내가 알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으나 전혀 알지 못했고, 반대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부분 알고 있는 일들이 종종 있다. 불국사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자주 그런 상황을 접했다. (85쪽)

 

내가 여행한 곳은 주로 책의 제7구간과 8구간에 몰려있다. 첨성대와 대릉원 근처 한옥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며 대릉원- 첨성대 –계림 –교촌마을 –최씨고택 -안압지를 마치 동네 산책하듯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갔다. 외국 여행객뿐만 아니라 국내 여행객도 많아서 그런지 경주 시민들이 관광객들을 대하는 태도 또한 친절하면서도 융통성이 있어서 매우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대릉원 바로 옆 숙소에 묵었던지라 카페나 상점가를 가려면 천마총을 지나서 가야 했지만, 매번 입장표를 끊을 수 없어 길을 조금 돌아가야 했는데 친절한 안내원 덕분에 한적한 대릉원을 거닐며 다닐 수 있었다. 또 하나의 매력은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 시야를 가리지 않으니 길을 걸으면서도 지는 해를 보며 시간을 가늠하고, 노을을 감상할 수 있었던 것도 하루의 큰 기쁨을 차지했다.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낯섦보다도 익숙함을 선물해준 경주라는 도시는 좋은 기억만을 담고 있다. 당시엔 여름이 막 시작될 즈음이라 푸른 잎을 보며 다녔지만, 불국사의 전경은 가을 단풍잎 사이에서 더 매력적이라고 하니 가을에도 꼭 가보기로 작정하고 기회만 엿보고 있다.

 

삶에는 상승과 하강이 존재한다. 하늘을 나는 여러 개의 연과 같이.

그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상승할 때와 하강할 때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든 연은 날아오르는 순간 추락이 예정되어 있다. 다만 힘이 다해 떨어지기 전에

미리 거두어 손질하면 완전한 추락은 일어나지 않는다. (236쪽)

 

다른 무엇보다 경주가 친숙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화려한 색의 단청보다도 색이 바래고 낡은 나무의 느낌이 시간의 역사를 눈으로 보는 것 같아 좋았던 불국사와 같이 인위적인 손길이 많이 느껴지지 않아 좋은 곳들이 많다. 경주를 여행하며 인상 깊었던 점은 이미 수많은 문화재를 찾아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곳곳에서 문화재 발굴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의 삶의 현장이자 터가 곧 역사의 흔적이라는 인식에서인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길을 정리하고 화단을 꾸미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내가 있는 곳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오니 삶을 대하는 태도 또한 달리 보이던 그곳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의 역사를 아는 것만큼이나 나를 바로 세우는 방법이 또 있을까? 경주 유적지를 둘러보고 있으면 우리 문화가 꽃피운 시절의 유산을 보며 뿌듯하다가도 여기저기 손실되고 부서진 잔해들이 말해주는 침략의 역사 또한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냥 탑이 무너지고 절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에 담긴 영혼이 파괴된 것과도 같은 아픔이다. 역사를 더 알고,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누군가의 부지런한 노력으로 갔던 곳을 상기시키고, 가보고 싶은 곳을 점찍어두니 경주란 곳의 사계절이 더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