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느낀 노인에 대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여행의 경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빠르게 전개되는 흡입력 있는 소설이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지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교차 편집으로 사건들이 빠르게 전개되고 인물들 간에 얽혀있는 우연성이 많아 수많은 사건들 속에 잠깐이라도 등장했던 인물들을 잘 기억해두면 뒷부분에서 절묘한 순간 나타나는 그들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재미가 더해진다. 무엇보다 어느 순간부터 각국의 정상들이 대거 나오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미국 간의 세력 다툼으로 일어난 한국전쟁이 언급되며 등장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은 이게 소설인지 역사서인지 헷갈릴 만큼 뜻밖의 재미를 선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정말 그 혼란스러웠던 시절 주인공 같은 인물이 있지도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알란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쓸데없는 기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 반대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될 터, 쓸데없이 미리부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p.271)

처음에는 다소 엉뚱하고 무모한 노인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간 폭발물을 다룰 줄 아는 기술만으로 노인에게 일어난 수많은 사건과 전 세계를 넘나들며 겪게 되는 인물들 간의 만남이 가히 역사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건들을 접하고 나니 그만의 저돌적이고 거침없으면서도 악의 없는 캐릭터가 잡혀나간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미리 앞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면서 가능한 한 낙관적인 자세로 상황을 헤쳐나가며 어딜 가나 누구 편인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견에 옹호하지도 그렇다고 상대를 배척하지도 않으면서 융합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을 기꺼이 해주는 모습이 처음엔 좀 줏대 없이 느껴지다가도 비슷하게 반복되는 상황들을 보며 다양한 인간의 내면을 이념이라는 말로 테두리를 치려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비치며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닌 주인공의 모습에서 진정한 자유를 외치던 그리스인 조르바의 모습이 떠올려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책에선 많은 이념 갈등과 정치적 상황을 통해 서로 속고 속이며 결국 누가 죄를 지었다고 처벌할 수 없을 만큼 그놈이 그놈인 아이러니한 상황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블랙유머와 함께 그런 심각한 상황들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도 시니컬해서 오히려 어떠한 판단도 소용없다는 듯 주어진 환경 속에서 조리 있게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어떤 이념이나 종교에 관한 한 쪽의 의견만을 내세우지 않아 사건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점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중간에 의도치 않은 살인을 하게 되는 부분은 죄를 물을 수도 묻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으로 변해버려 약간의 찝찝함을 남기지만, 주인공과 함께 어울리며 사람 간의 유대를 찾아가는 인물들의 상황 또한 구식처럼 느껴지지만 역시 사람은 서로 어울리며 부대끼는 것이 살아가는 모습이란 걸 느끼게 된다.

그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만사는 그 자체로 놔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일들이 일어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놔둬야 하지. 왜냐하면 만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니까. 거의 항상 그래. (p.317)

비록 소설일지라도 100년을 산 주인공 알란의 경험을 통해 지나가버린 과거에 더 이상 징징대지 말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 따위도 하지 말고 흘러 들어온 인생에 흡수되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지를 펼쳐 보이며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죽는 그날까지 새로운 경험과 함께 지루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