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은 산책할 때마다 ‘해럴드 프라이’할아버지가 생각날 듯싶다. 주인공의 ‘한발 앞에 한발을 내딛는’ 걷기는 즉흥적인 여행이 되었고, 웃고 울었던 여행의 과정은 성스러움을 지닌 ‘순례’로 거듭났다. BBC 라디오드라마로 시작되었다는 책은, 지은이가 후두암으로 세상을 뜬 아버지를 위해 썼다고 했다. 암으로 오그라들고 오그라든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책이지만, 정작 아버지는 이 작품을 보지 못하고 떠났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작품에 절절이 녹아있음은 분명하다. 글을 쓰며 해럴드가 겪는 기복을 함께 겪었다는 지은이처럼, 그 기복은 책을 읽는 독자 역시 겪을 수밖에 없다.

  20년 전에 함께 근무하던 직장동료에게서 편지를 받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것도 암에 걸려 삶의 마지막을 정리한다며 작별인사를 전한다면. 반갑고 고맙지만 서글프고 미안할 것 이다. 여태 안보고 잘 살았으면서 괜스레 짜증스럽고 쓸쓸한 마음에 울고 싶어질 것도 같다.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에 따라 감정의 농도는 달라질 테지만. 해럴드 또한 울컥한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동안 왜 퀴니 헤네시를 찾아보려 하지 않았는지, 어떤 모습으로 늙었을지, 하필이면 멀고먼 북쪽 끝에 있는지 등등 온갖 생각과 감정이 뒤엉킨 상태였다. 어쨌든 죽음을 앞둔 퀴니에게 해럴드는 마지막 안부를 전하고 싶은, 궁금하고 고마운 사람이었을 터다. 

  해럴드는 뭔가 부족한 듯하게 쓴 답장을 부치러 길을 나섰다. 다음, 다음 우체통까지만 가겠다고 생각하며 걷던 해럴드는 한참을 걸어 도착한 부둣가 벤치에서 퀴니가 보낸 편지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서 그제서야 눈물을 흘린다. 퀴니를 떠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아내 모린은 멀기만 했던 아들 데이비드와 시아버지에게 자신의 역할을 대신했다. ‘모린이 사실상 해럴드라면, 그럼 나는 누구일까’ 자문하는 해럴드. 낭패감을 느끼던 해럴드는 상점에서 만난 소녀의 ‘믿음’에 감명 받아 퀴니가 있는 버윅까지 당장 걸어가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해서 이십 년 전에 그에게 친구로 자리 잡았던 여자를 위해, 그 친구가 계속 살기를 바라며 걷는 ‘순례’는 시작됐다.

  해럴드는 종교적 믿음을 부정하지만 작품의 저변에는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여정인 ‘천로역정’의 과정이 깔려있다고 역자는 말한다. 해럴드의 여정을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길 위의 사람들은 결국 응원을 하게 되고 수많은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그들 자신조차 숭고한 여정에 동참하기를 갈망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예순 다섯의 나이에 1000km를 걸어가는 여정이 쉬울 리 없다. 걸으면서 겪게 된 몸과 마음의 고통은 변주와 합주를 하며 흐르고 흘러서 해럴드를 웃게도, 울게도 했다. 순수한 에너지로 충만해져 벅찬 기분을 느끼다가도 퀴니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절망하게 된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순례를 마칠 수 있을 것인지, 해럴드의 믿음으로 퀴니가 낫게 될지....

  해럴드는 길 위의 풍경에서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깨닫고 즐거워한다. 한편으론 기쁨을 다 짜내버린 듯 딱딱하게 경직된 사람들의 표정에서 자신이 살아온 모습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평온해 보이는 일상이지만, 이면에 무시무시한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데도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그 노력이 무척이나 외롭다. 자연스럽게 고된 여정만큼이나 복잡다단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해럴드. 행복과 불행, 좌절과 고통을 한데 묶어 깊숙한 곳에 처박아 버리고 무덤덤하게 살아왔다. 순례길은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어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내며 과거와 자신과 아내 모린과 화해하는 과정을 고요하게 돕는다. 해럴드는 보트슈즈와 단벌로 노숙하며 영국 남부 킹스브리지에서 북쪽 끝 버윅어폰트위드까지 1000km를 걷는다. 나 역시 해럴드의 손을 잡고 걸으며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순례를 완성하기를, 퀴니가 낫기를 간절히 응원했다. 목적지나 지나가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역정(과정)이 중요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책과 고집스럽지만 자애로우셨던 내 할아버지가 생각나는 주인공 해럴드 프라이가 참 좋았다. 솔직하고 담백한 작가의 에필로그까지 모두 다 마음에 드는 책이다.

해럴드프라이, 순례, 민음사, 레이철조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