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캬아~” 맛있는 술을 마셨을 때의 감탄사를 참 여러 번 내뱉게 한 책이다. 알코올 성분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느껴지는 짜릿함과 뜨끈함이 러셀의 글에 있었다. 가장 유명세를 누린 시기에, 가장 널리 읽힌 이 책을 [인기 없는 에세이]라고 지었다는 이야기에서 묘하게도 ‘러셀의 역설’이 떠올랐다. 철학자로 잘 알려진 러셀은 프레게, 괴델 등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로도 꼽힌다. 그의 첫 저서 [수학의 원리]에서 칸토어의 집합론이 지닌 결함을 ‘역설 상황’으로 찾아내 수학계에서 ‘러셀의 역설’로 일컬어졌다.

  서문에서 커크 윌리스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세계에 관한 글들에 책의 무게중심이 실려 있다고 소개했다. 확실히 러셀은 오랜 기간에 걸쳐 쓴 글을 그러모은 열 두 편의 에세이에서 전쟁의 참상, 나치즘의 해악, 부당한 관념과 인식, 온갖 허상들에 대해 유려한 필치로 풀어낸다. 그중에서도 나는 ‘초보자를 위한 철학, 철학자들의 은밀한 속셈, 위대한 스승이 되려면, 스스로 쓴 부고’부분이 퍽 인상깊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저자를 잘 알게 된 듯한 느낌이다. 허나 한권의 책을 읽고 마치 잘 안다는 듯이 이리저리 재고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큰 교만이었는지 한 인물이 쓴, 그에 관한 여러 저작을 읽다가 문득 깨닫곤 한다. 버트런트 러셀이 바로 그렇다. 그가 쓴 책을 한 권 한 권 읽어나갈 때마다 러셀이 소개하는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리며 다양한 분야에 대한 방대한 관심과 넓고 깊은 사유 활동에 놀라곤 한다. 명쾌하고 재치 있는 그의 글에서 밝은 면을 보았다면 그를 설명한 글에서는 어둡고 음울한 영역의 삶을 알 수 있었다. 논리학자로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을 추구했던 그에게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는 러셀을 철학자로, 평화주의자로 변모시켰을 것이다. 명문가의 백작이라는 틀을 벗어난 자유로운 삶과 세계 곳곳에서의 경험은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너른 시각의 토대였으리라.

  논리적이면서도 우아하게 이어지는 러셀의 글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세상의 비뚤어진 인식과 오류를 러셀만의 풍자와 재치로 명쾌하고 진지하게 풀어낸다. 책의 마지막을 차지하는 ‘스스로 쓴 부고’는 자신의 잘못됐던 선택을 통렬하게 비판하며 객관적인 뉘앙스를 풍기면서 논란이 된 사생활을 에둘러 유쾌하게 표현했다.

  “...그는 틀림없이 수학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그만 현상과 관련된 원칙의 문제를 무시하고 그릇된 수량적 견해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트리니티 칼리지는 매우 적절하게 그의 교원자격을 박탈했고...”

“...이듬해부터 그는 사회주의와 교육 개혁, 도덕적으로 융통성 있는 결혼관 등을 옹호하는 저술활동에 힘을 탕진했다.....그가 남긴 역사적인 저작들은 저자 본인이 끝까지 믿었던 구닥다리 합리주의와 피상성을 부주의한 독자들의 눈으로부터 감출 수 있었는데 이는 그의 문체와 재치 덕분이었다.”

“러셀은 한평생을 천방지축으로 살았지만 그 삶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으로 일관성이 있었고....그의 신념은 기묘했으나 그의 행동은 늘 신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생활에서 그는 자신의 글에 가시처럼 돋은 신랄함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지만....”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면 의식이라도 치르듯이,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는 듯이 앞뒤표지를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책의 내용을 기막히게 표현한 표지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고 무릎을 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책 역시 그랬다. 책의 전체 내용이 표지에 모두 들어있었다. [인기 없는 에세이]는 책 속 내용이 컨셉트맵으로 디자인된, 표지까지 완벽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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