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며 스칼렛이 자꾸 떠올랐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철저한 남부인의 시선으로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KKK를 미화했다고 비판받는다. 마거릿 미첼은 목화왕국, 노예제도, 못된 양키 같은 편견과 증오에 가득한 관념 안에서 살아온 남부인들과 백인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성장한 스칼렛의 삶을 집요하게 그려냈다. 열다섯 스칼렛과 일곱 살 스카웃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편견에 싸인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얼마나 더딘지 생각하게 된다.

    오빠 젬의 팔이 부러졌던 사건의 근원을 두고 입씨름을 벌이는 남매의 장면으로 시작하는 책은 스카웃의 목소리로 잊을 수 없는 3년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캘퍼니아 아줌마의 잔소리와 보살핌을 받고 자라는 남매는 저녁이면 아빠와 신문을 함께 읽는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스카웃은 오빠 젬, 친구 딜과 함께 주변세상을 탐색하며 장난에 골몰한다. 집에 갇혀 지낸 25년의 세월만큼 소문이 무성한 이웃의 부 래들리는 아이들의 주요 관심대상이 된다. 아이들은 호기심과 공포사이에서 덧문사이를 기웃거리고 낚싯대 끝에 인사편지를 매달아 건네려 한다. 젬은 한밤중에 래들리 집의 마당을 돌아다니다가 들켜서 울타리에 바지를 벗어버리고 온다. 다시 바지를 찾으러 갔을 때 바지는 거친 솜씨로 꿰매져 울타리 위에 곱게 놓여있었다. 스카웃과 젬은 학교를 오가며 지나는 래들리 집 앞의 나무옹이 안에 들어있는 동전, 고장 난 시계, 메달 등의 자잘한 물건을 발견한다. 남매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조각한 비누인형을 보고서야 옹이 안의 물건들이 자신들에게 주는 선물임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감사 편지를 넣어둔 다음날 구멍은 시멘트로 메워지고 젬은 눈물을 흘린다. 부 래들리 아저씨에게 관심을 갖고 그를 집에서 끌어내려던 장난은 시들해진다.

    학교생활을 시작한 스카웃은 이런저런 소동을 겪으며 학교를 가기 싫어하게 된다. 아빠와 모디 아줌마는 다정하고 친절하게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설명한다. 지은이는 경제공황의 피해로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갚을 수 없는 도움은 거절하고 진 빚을 곡물, 열매, 장작 등으로 천천히 갚아나가는 순해 보이는 사람들이 인종갈등 문제에서는 이성을 잃고 위협적으로 변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흑인을 변호하는 스카웃의 아빠를 비난하고 협박하지만 애티커스는 시종일관 초연하고 온화한 태도를 보인다. 이 모습은 젬과 스카웃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상당한 안정감을 준다.

    남매가 엉뚱한 장난과 모험을 일삼지만, 변호사인 아빠 덕분인지 두 사람은 또래에 비해 생각이 깊다. 조숙한 젬이지만, 자신의 아빠를 ‘검둥이 애인’이라고 거침없이 욕하는 듀보스 할머니에게 분노하게 된다. 젬은 할머니의 동백꽃을 모조리 망가뜨리고 아빠는 할머니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타이른다. 젬은 꽃밭을 망쳐놓은 벌로 매일 할머니에게 책을 읽어드리게 되고 오빠를 따라간 스카웃은 멀리서만 봤던 할머니를 자세히 관찰하게 된다. 흉한 몰골로 심술궂은 말을 건네던 할머니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정신을 잃고 발작을 한다. 책읽기 벌이 끝나고 얼마 후에 듀보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빠는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몰핀 중독이었던 할머니는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젬이 책을 읽어주는 동안 금단현상을 견디느라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아빠는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면서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배우기를 원했다고 말한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 이라는 애티커스의 이야기는 젬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스스로에 하는 다짐일 것이다. 애티커스는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앞으로 아빠에 대한 여러 소문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경고한다. 그 심각한 문제는 2부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앨리배마주의 메이콤군은 노예해방이 되었어도 여전히 계층 간의 반목과 갈등이 깊고 편견이 뿌리 깊은 지역이다. 젬의 분류에 따르자면 메이콤에는 네 종류의 계층이 있다. 스카웃의 집처럼 가문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있고 커닝햄 같은 농부들, 유얼집안처럼 가난한 백인들과 흑인들이 있다. 젬 같은 어린아이조차 주민들의 내력과 일반적인 경향을 모두 알 정도로 작은 마을 메이콤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계층을 증오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얼가의 첫째딸이 흑인에게 강간을 당한 사건에 대해 재판이 열리고 책은 법정의 모습과 사람들의 반응, 어른들에 행태에 혼란을 느끼는 아이들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낸다. 기꺼이 도움을 주고 상냥했을 뿐인 흑인청년을 범죄자로 몰았던 유얼가의 딸은 어쩌면 25년 동안 집 밖에 나오지 않은 부 래들리보다 더 외로웠을 거라고 스카웃은 생각한다. 백인들은 그녀가 돼지처럼 살고 있기 때문에 상대하려 하지 않았고 흑인들은 그녀가 백인이라는 이유로 상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부에서 땅도 없고 명문가도 아닌 무식하고 가난한 백인은 당시 ‘백인쓰레기’로 불렸다고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상류층의 노예들이 백인쓰레기 가족을 멸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메이콤 사람들은 유얼가 사람들에게 구호품 바구니를 건네고 극빈자 생활기금을 주면서 경멸까지 보냈다. 천대받던 유얼가 사람들은 자신들의 울분과 분노를 무고한 흑인청년에게 터트렸던 것이다.

    책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여러 군데 있지만 재판도중에 스카웃의 친구 딜이 흐느껴 울게 된 사연이나 재판결과에 상심한 아이들이 한층 성숙해져가는 모습, 스카웃이 부 래들리 아저씨의 시선으로 주변과 마을을 돌아보는 장면은 특히 감동적이었다. 백인이 언제나 이기는 비열하고 불공평한 현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고통, 죄가 없는 톰 로빈슨이 사형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아이들은 몹시 아파하고 상심한다. “나는 크면 어릿광대가 될 거야. 웃는 것 말고는 사람들에 대해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을 거야. 그래서 서커스단에 들어가 허파가 터지도록 실컷 웃을 거야.” 라는 말에 “딜. 넌 지금 반대로 알고 있는 거야. 광대들은 언제나 슬퍼. 그들을 보고 웃는 건 관객이란 말이야.”라고 젬이 답한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인 줄 알았던 메이콤 사람들이 누에고치 안에 포근히 감싸인 채 잠들어 있는 번데기 같다고 덧붙인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현실을 더 정확히 짚어내서 가슴이 아팠다. 모디 아줌마는 아이들을 위로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톰 로빈슨을 도와주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배심원들을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든 점은 아기 걸음마 같아도 진일보임에 틀림없다고 말이다.

    애티커스 변호사는 남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엽총을 주면서 노래만 부를 뿐 어떤 피해도 주지 않는 새를 죽이지 않도록 당부했었다. 책의 말미에 스카웃은 부 래들리나 톰 로빈슨처럼 소외된 약자가 바로 해를 끼치지 않고도 죽어가는 앵무새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히틀러를 비판하던 선생님조차 흑인을 증오하고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인종차별주의자인 상황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꿋꿋이 버텨냈던 애티거스 변호사를 비롯한 여러 이웃들의 모습과 스카웃의 깨달음은 깊은 울림을 준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전에 자기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하고,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 이라던 아버지가 하퍼 리의 신작 [파수꾼]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니 궁금해진다.

    옮긴이의 노력과 정성도 돋보인다. 오탈자가 한군데도 없었고 기존의 번역을 허물어뜨리고 현실에 맞게 새로 번역했다는 설명과 표준어를 쓴 흑인 방언에 대한 설명은 책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흑인방언이 구별되지 않아 인물간의 대화에서 흑인을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책에 깊이 들어갈수록 자연스레 알게 됐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옮긴이 역시 흑인방언 번역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주어와 술어가 바뀌고 단어나열로 뚝뚝 끊기게 된 표현이 처음에는 읽기 거북했는데, 그런 흑인의 말투가 나중에는 정겹기까지 했다. 어느 쪽이든 책속에 깊이 빠져 들다보면 옮긴이의 노력은 전달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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