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책을 출간하는 정민교수를 보면서 늘 의아했다. ‘한 사람이 이렇게 고품질의 책을 연달아 내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궁금증은 묘한 질투로 이어졌다. 책을 좋아하게 될 수록 글쓴이에 대한 동경과 비례해서 시기하는 마음이 커지고, 자꾸 책과 작가에 대해 꼬투리가 잡고 싶어진다. 나 좀 못됐다. 그런데 저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어느 책에서 정민 교수의 인터뷰를 읽고 오롯한 믿음을 지닌 순한 독자가 되었다. 수많은 저술가들에 대한 내용 중에 정민 교수의 이야기가 단연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키가 훌쩍 큰 ‘의료용 차트를 꼽아두는 회전식 꽂이’를 구입해서 책을 뚝딱 내놓을 수 있는 보물상자를 만들었다. 수많은 관련 자료와 아이디어를 생산, 분류, 갱신해 놓은 차트꽂이는 지은이의 탁월한 저술을 뒷받침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자, 꾸준한 노력과 열정의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우리 한시 삼백수]는 그 결과물의 하나이다.

  [우리 한시 삼백수]는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매일 한편씩 3-4년을 작업했다는 지은이처럼, 읽는 이 또한 매일 조금씩 천천히 구절구절 곱씹어 봐야 할 책이다. 송 익필의 시 <달 보며>를 보자. “안 둥글 젠 더디 둥금 늘 안타깝더니/ 둥근 뒤엔 어이해 저리 쉬 이우는가/ 서른 밤 가운데 둥근 것은 하룻밤뿐/ 백년 인생 마음 일도 모두 이와 같구나” 날마다 변하는 달의 모습에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답게 인생사를 포개어 놓았는지 감탄이 절로 난다. 신흠이 지은 <상심>은 또 어떠한가. “벌은 꽃술 빨아 먹고 제비는 진흙 물고/ 비 갠 뒤 깊은 집엔 푸른 이끼 자옥하다./ 봄 들어 한 없는 마음 상할 일들일랑/ 꾀꼬리에 분부하여 실컷 울게 하여라.” 내 슬픈 마음을 꾀꼬리가 실컷 우는 것으로 풀겠다니 에두른 표현이 참으로 멋지다.

  책에 소개된 삼 백수에서 지은이의 말처럼 ‘감출수록 빛나는 절제의 언어 시’의 맛이 절절히 느껴진다. 책은 당대의 명문장가로 알려진 최치원, 김부식, 이규보 이색 정몽주 등등의 수많은 인물들의 시조를 시대순으로 들려준다. 지은이의 해설은 구구절절하지 않고 간략하고 담백하다. 독자 스스로 시조를 최대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 같아 좋았다. 책은 말미에 인명순으로 시조를 지은 작가를 간략히 소개해 놓았을 뿐 아니라, 한시에 우리말 독음까지 달아두었다. ‘고전’을 소개한 책을 볼 때면 ‘암호나 그림’을 보듯 한자가 나온 부분은 후두둑 넘어가곤 했는데 독음과 낱말풀이 덕분에 더듬더듬 읽어 볼 수 있어 이 또한 좋았다. 유홍준 교수는 [명작순례]에서 궁궐의 현판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했는데 ‘현판’이 들어갈 자리에 ‘한시’를 넣어도 무방할 듯싶다.

  “인문정신을 획득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문자의 해독과 문장의 이해다. 한자를 읽을 수 없고 또 그 뜻을 모르면 현판은 알지 못할 부적글씨와 다름이 없다. 선조들의 정신이 깃들어있는 한자와 한문을 외래어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멀어지게 하면 우리 전통문화유산의 한 부분을 잃어버리게 된다. 궁궐의 현판과 주련이 지닌 깊은 뜻과 아름다운 멋을 관람자들이 가슴속에 담아갈 수 있는 문화적 성숙을 길러야 할 때다.”

우리한시삼백수, 김영사, 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