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국민발의안이 연방의회에 제출됐다는 소식이 있었다.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는 헌법 조항을 신설하자는 것이다. 국가가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동일한 돈을 지급한다는 스위스의 기본소득법안 뉴스를 보면서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세계에서 살기 좋은 나라로 손꼽히는 스위스는 지금보다 더 ‘평등한 삶’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오히려 갈수록 불평등이 심화되는 사회, 기초적인 생활권을 보장받지 못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국가에서는 숨죽이고 있는데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정확히 이 부분을 짚고 있다.

  ‘돈이 돈을 버는’ 불평등의 가속적인 확대재생산으로 소수가 부를 독점하게 되면서 세계는 완벽하게 양쪽으로 갈라지고 있다. 소위 글로벌슈퍼리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계의 부는 상위 1%가 독식하고 있다. 부의 최상층 편중이 뚜렷해지면서 부를 구성하는 피라미드의 상층부는 갈수록 좁아진다. 접점이 거의 없고 소통도 거의 끊어져 있는 두 세계의 빛과 그림자는 갈수록 선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온갖 부작용을 낳는다. 그렇다면 다수가 불평등인 세상에서 ‘평등과 분배’를 요구해야할 희생자들은 왜 침묵하는가, 무엇에 속고 있나,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책은 불평등이 만연한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유지되는지 냉철하고 날카롭게 분석한다.

   바우만은 불평등이 지속되는 이유를 당연시 여기는 암묵적인 전제들, 불평등의 교의, 경제성장과 경쟁의 허울, 소비조장의 함정 등으로 꼽는다. 대중들의 눈과 귀를 가려 인식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암묵적이고 은폐된 믿음들은 숙고되거나 검토된 적이 없고 타당한 것처럼 포장된다. 탐욕, 경쟁, 부패, 이기심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하는 협력과 연대는 외면당한다. 온갖 모순을 낳는 불평등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행복’으로 여기는 소비에 빠져들거나 남과의 차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 안으로 움츠러든다. 현실을 인간의 힘으로는 맞서거나 개혁할 수 없는 ‘당연한 세상 이치’로 오해하고 체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허황된 이명박 전대통령의 747공약 -7%의 경제성장에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위 경제대국 건설- 은 바우만이 지적하는 경제성장의 허울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명박 정부는 부의 분배방식에 대한 논의는 제쳐두고, 경제성장과 GNP 통계라는 숫자놀음으로 국민을 호도하고 탈규제정책과 부자감세로 최상층부의 이익만을 도모했다. 747공약을 달성돼서 사회 전체의 부가 증가했다면 사회적 피라미드의 최상층부와 최하층부의 간극은 더욱 벌어졌을 것이다.

  바우만은 엄청난 임금이 보장받는 엘리트들의 문제점도 지적한다. 스티브잡스나 리처드 브랜슨 같은 유명인사를 들먹이며 ‘낙수효과’를 주장하지만, 이는 성과에 관계없이 보장된 자신들의 특권과 보수를 은폐하기위한 가림막이라는 것이다. 가치있는 사람들은 올라가고 가치없는 사람들은 배제되거나 추락함으로써 발생되는 불평등은 자연스런 결과라는 것도 잘못된 믿음이다.

  책은 경쟁에 내몰리고 절망에 빠진 대중들이 조장되는 ‘소비’의 세계로 빠져드는 과정을 데카르트의 주체와 객체 이론에 빗대어 설명한다.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주체와 사유대상인 물질 사이의 비대칭적인 관계는 고객과 상품, 소비자와 소비재의 욕구 충족이다. 인간과 사물간의 주체-객체관계에 대한 서술은 권력, 통치, 지배에 대한 서술과 놀라울 만큼 유사하고, 우월함과 종속, 명령과 복종, 행동의 자유와 순종이라는 인식과 경험으로 우리 안에 녹아든다. 고객-상품 패턴의 탈을 쓴 비대칭적 주객관계모델은 소비를 통해 주입내지 훈련된다. 그러나 인간 대 인간의 관계는 대칭적이다.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행위자인 두 주체 간에는 마찰과 충동 가능성이 있어 긴장을 야기한다. 바우만은 인간관계에서 주체들이 골치 아프고 껄끄러운 협상, 불쾌한 타협, 쓰라린 자기희생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마음을 단단히 먹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말한다. 이른 위험들은 인간 친화적이고 협력적인 공생에서 특별하고 건전한 즐거움을 얻게 될 때 늘 따르는 대가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인간관계에 따르는 불쾌함과 불편함을 제거를 약속하며 소비를 조장한다. 소비재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은 더 많은 소득, 성장제일주의, 경쟁과 탐욕의 함정으로 우리를 빠뜨린다.

  “우리는 하나의 소비대상을 처분하고는 그것을 사회적 지위와 성공적 삶을 위한 경쟁에서 우리가 올린 득점을 측정하는 주요 척도인 새롭고 향상된 소비 대상으로 대체한다. 우리는 골치 아픈 일에서 벗어나 만족으로 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문제들의 해결책을 상점에서 찾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소비의 즐거움의 충만은 삶의 충만을 의미한다.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쇼핑할 것인가 쇼핑하지 않을 것인가는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바우만은 현재의 불평등은 단일 민족국가를 넘어 전세계적 차원으로 진행되고 있고 파국으로 치다를 것으로 보인다는 어둡고 섬뜩한 전망을 한다. 그러면서도 온통 성장과 소비, 경쟁에만 매달려있는 세계에서 ‘탐욕에 유익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말과 행위의 간극이 얼마나 넓은지 돌아보라고 권한다. 우울한 현실의 세계에 살지만 변화의 가능성을 역설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행위를 함으로써 계속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 한 공생공락이라는 희망의 끈은 이어질 수 있음을 내비친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믿게 되는, 이런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세상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옳은 결론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대안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결론짓는다. 잘못된 결론이다.”

  백 여쪽의 얇고 작은 책에서 불평등의 세계와 이면을 명쾌하게 풀어낸 구순의 노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진이 책의 뒷표지를 장식한다. 빛을 뿜어내는 듯한 그의 깊고 깊은 눈을 보면서 내내 일깨워주는 구실을 했던 [분노하라]의 스테판 에셀이 떠올랐다. 불평등의 문제를 간명직절하게 풀어낸 글에서는 500자 분량의 짧은 글 정신으로 유명한 [길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도 생각났다.

불평등, 지그문트바우만, 동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