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ad :: Cormac McCarthy

프로메테우스에게 ’불’ 을 건네 받은 인간은 그가 그 댓가로 심장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게 되었음에도 아무런 가책이나 겸허함 없이 제멋대로 ’불’ 을 남용하다 결국 세상의 파멸을 맞이하고 말았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그제서야 불의 잔혹함과 신성함을 깨달았다. 있어도 멸해지고 없어도 멸해지는 ’불’ 은 과연 인간에게 있어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가. - 이 소설은 이러한 논제를 바탕으로 출발한다.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로 한 중년의 아버지와 어린 아들은 안전한 곳을 향해 황폐한 땅을 걸어간다. 그들이 가진 것은 추위를 막아줄 낡은 담요와 비를 막아줄 방수천, 약간의 통조림 음식과 그것을 담아가는 카트뿐이다. 그들 말고도 남은 생존자들을 길 위에서 간간히 만나지만 대부분 약탈자들이며 굶주림으로 인육까지 먹는 이들이라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제외한 사람을 극도로 경계한다. 한계를 시험 받는 추위와 배고픔, 식인 위협에 쫓기면서도 그들은 의지를 잃지 않고 ’불’ 을 운반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이미 은유로 점철된 세계관이 전제 되어 있어 불필요한 설명 없이 길 위에서의 그들의 행동과 주어진 환경만을 미니멀하게 스케치 하는 이 소설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형태가 불분명한 ’불’ 의 존재다. 맥카시가 메타포 하는 ’불’ 은 다양한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그 첫째가 재앙과 폭력으로서의 ’불’ 이다. 분명 (핵)무기라는 ’불’ 에 의해 초토화가 된 것이 분명한데도 아버지는 그 무기(권총)라는 ’불’ 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 소년이 만난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산탄총과 탄약으로 무장을 하고 소년 앞에 나타나 그에게 총을 잘 간직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소년은 아버지와 있을 때에도 남자를 만났을 때에도 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 세대간의 대비가 어쩌면 노년의 코맥 맥카시가 생각하는 ’희망’ 이 아니었을까.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보며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는 그는 콜럼바인이나 버지니아 총격 사건처럼 아이들이 무기로 죽어가는 현실을 보며 아비로서 깊은 우려를 품고 모쪼록 자신의 아들이 성장했을 때는 그런 일이 다시는 없기는 바라는 마음에 작중의 소년이 무기에 의존하지 않는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무기라는 ’불’ 을 필요로 하지 않는 소년에겐 대신 연민과 배려라는 ’불’ 이 있다. 죽어가는 노인과 홀로 헤매는 아이를 측은히 여겨 함께 가고자 하는 모습은 절박하고 음울하기 짝이 없는 소설 속에서 감동의 시너지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디스토피아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이 시대며 인간에겐 폭력의 속성이 있다고 얘기하는 맥카시는 그러나 그것은 자기네 세대의 습성으로 그치고 앞으로 다가 올 시대에는 지금의 아이들이 저마다 소년의 ’불’ 을 간직해 진정한 유토피아를 건설해나가길 바란다는 은연 중의 주문, 혹은 바람을 소년을 통해 내비치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소설의 결말은 결코 어둡지 않고 희망적이다. ’좋은 사람’ 을 찾으라는 아버지의 말에 소년은 남자를 만났을 때 ’당신이 좋은 사람인지 어떻게 아느냐’ 고 묻는다. 남자는 ’운에 맡겨야 한다’ 고 대답한다. 소년은 (혹은 독자도) 희망한다. 그가 좋은 사람이기를. 그가 ’불’ 을 운반하는 이 이기를. 애초에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연유도 그가 인간에게 연민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아버지로부터 ’불’ 을 운반해야 된다는 유언을 듣고 남자에게도 ’불’ 을 운반하냐는 질문을 하는 장면을 통해 다시금 인간에게 있어 ’불’ 이 무엇인가를 환기시킨다. 자신의 아이를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아버지나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던 남자는 비록 무기라는 불에 타성적으로나마 의존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은 자신들이 진정 의존하고 있었던 ’불’ 은 다름아닌 ’아이들’ 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생에 집착한 것은 스스로 어떤 막연한 희망을 품고 나아갔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아들이 없었다면 그는 과연 그만큼 삶의 의지도 최소한의 모럴도 지킬 수가 있었을까? 그는 아들을 위해 살았고 아들 때문에 살았다. 비록 아들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지 못하고 길 도중에 죽지만 그는 아들을 위해 희생함과 동시에 죽는 순간까지 아들에게 의존했다. ’죽은 아들을 품에 안을 수 없다’ 는 그의 말은 아들이라는 불씨, 온기에 그때까지 지탱해 왔다는 절박함을 내보인 것이 아니었는지.

부모의 자리는 그 어떤 자리보다 힘에 겹다. 뱃속에서 꺼내 세상에 내놓는 순간부터 온몸에 족쇄가 채워진다. 나 라는 불완전체가 그대로 투영되어 자아를 시험 받는다. 별개의 생명체인데도 아이의 잘잘못은 모두 내 몫이 된다. 버겁고 분에 못이겨 아이에게 생채기를 가하면 아이의 몸과 마음에 남겨진 상처가 그대로 내 낙인으로 찍힌다. 일부는 그 고통을 못견뎌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하지만 영원한 은둔자가 되어 다시는 ’불’ 을 되찾지 못한다. 견디는 이들은 평생토록 자식을, 아이를 위해 노역하게 된다. 그러나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그것이 우리를 생존케 하는 ’불’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프로메테우스의 후예들이다. 흙을 빚어 인간을 만든 프로메테우스가 그 연약함을 안쓰러이 여겨 ’불’ 을 훔쳐주고 심장이 파먹히는 형벌을 기꺼이 받았듯이 우리는 아이라는 ’불’ 을 낳아 프로메테우스가 받은 형벌을 전수 받았다. 그리고 아이에게 이야기 한다. ’불’ 을 반드시 운반하라고. ’길’ 을 끝까지 가라고. 맥카시는 그렇게 인간의 숙명을 간결하고도 묵직하게 서사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