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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 Day's Journey Into Night :: Eugene O'Neill

초등학교 3학년 때,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나에게 어떤 아줌마가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이 나의 친이모이며 '네 엄마는 지금의 엄마가 아니라 따로 있다' 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믿는 둥 마는 둥 했다. 아홉살의 나이에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나 터무니 없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저 '출생의 비밀' 이라는 허울 좋은 소녀의 판타지로 생각하려 했다. 그러던 중학교 3학년 때의 어느 날, 어머니와 다투다 나도 모르게 '당신이 내 친 엄마가 아닌 거 안다' 고 내뱉어 버렸다. 단 한번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빛이 사색이 되면서 '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 는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그제서야 현실을 알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부서져 버렸다. 내가 무려 6년간 그 사실을 알면서도 숨기고 있었다며 당신을 기만한 것으로 받아들인 어머니, 아니 새어머니는 나에게 영영 등을 돌려 버린 것이다.

이후로 나에겐 학창 시절 같은 건 없었다. 오로지 겉도는 생활 뿐이었다. 수업 땡땡이는 예사고, 학교 유리창을 마대 자루로 부셔버리거나 동급들 보는 앞에서 커터칼로 팔등에 피를 내어 문신을 새기는 등 온갖 기행을 일삼았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쫓겨나고 학교라는 조직에서 스스로 이탈해버린 나는 그 이후로 그 어떤 곳에도 소속할 수가 없었다. 졸업하자마자 교복을 찢어버리고 졸업 앨범 따위의 것들을 학교 쓰레기통에 내버린 채 사회로 나온 나는, 내가 있을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녔다. 타인을 통해 대체 가족을 만들려고 애를 썼지만, 그것은 집착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버겁게 하고 인간 관계의 무수한 실패만을 자생해낼 뿐이었다.

거의 내 자신을 내버리다시피 했을 때. 지금의 남편이 나타났다. 그는 나를 구원했다. 비로서야 나는 모든 것이 보상 받았고, 이제 나도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정상적'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만든 또 하나의 판타지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성장해 갈수록 과거의 내가 그대로 투사되는 현실의 악몽을 보게 된 것이다. 유치원을 다니면서 다른 아이와 달랐던 아이는 초등학교라는 사회적 조직에 입학하자 내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학교에 부적응했고, 늘 왕따를 당했다. 담임 선생마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어미로서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이 아이를 내 뱃속에서 세상에 내놓은 일을, 어미 자격 없는 이가 아이를 낳는 죄악을.

공교롭게도 그 근간에 나는 친어머니를 26년만에 재회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나는 이미 남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그 이후 자신에게 뿌리도 없는 채, 어미로서 갖춰야 할 것을 애초에 상실, 아니 가질 수 조차 없었던 채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자 부조리라고 생각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저 어린 시절의 나를 투사시키는 아이를 때리고 또 때리던 어느날, 나는 내가 미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모든 제어의 끈이 끊어지며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는 자학의 발작이 시작 되었고, 정신과에서는 그것을 '공황장애' 라고 진단 내렸다. 발작의 고통은 내가 점점 더 미쳐간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주는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수없이 자살 시도를 했다. 목을 매달고, 손목을 긋고, 수면제를 다량으로 털어놓고, 아파트 고층에서 뛰어 내리려 했다. 그것도 아이가 보는 앞에서. 아직 채 열 살이 안된 아이의 바로 눈앞에서.

목을 매달아 혼절한 나를 조그만 손으로 끌어 내리고 흔들어 깨우며 '왜 이렇게 못된 짓을 하세요' 라고 우는 아이를 보며 나는 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안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며 통곡을 해도 이미 저질러버린 일은 씻겨낼 수가 없었다. 아이는 학교 다니기를 스스로 포기했고 우리 가족은 남들과 다른 가정이 되었다. 나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견딜 수 없어 하면서, 오로지 남편과 아이를 위해 살아 남아야 하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이미 지옥의 형벌을 받고 있지만, 그들에게 더한 죄를 지을 수는 없었다. 아내가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고 눈앞에서 투신 자살하는 영화의 장면을 보고 흐느껴우는 남편을 보며, 자해 심리로 삭발해버린 내 민둥 머리를 애써 예쁘다고 말해주는 서글픈 모습의 어린 아들을 보며, 나는 살아 남는 것이 형벌을 받고 죄를 갚아 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유진 오닐에게 있어 [밤으로의 긴 여로] 의 집필을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바로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거의 가감없이 적어낸 고백서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배우였던 아버지의 몰락, 둘째 아들을 잃고 큰 아들을 미워하다 모르핀 중독에 빠진 어머니, 알콜중독자가 되버린 형, 그리고 그 형을 따라 방탕하게 살다 자살을 기도한 유진 오닐 자신...그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그대로다. 비록 희곡으로 집필 되었지만 자신의 눈으로 재연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오닐은 자신의 사후 25년 동안 이 작품을 발표하지도, 영원히 무대에도 올리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면 굳이 이 작품을 왜 썼던 것일까?

나는 오닐의 두 아들이 그보다 앞서 자살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연표를 보며 그의 심정을 감히 헤아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불안한 삶을 살며 붕괴된 가족에서 떨궈져 나와 다시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가족을 일구었을 때, 그는 그것이 자신의 영원한 바람임과 동시에 결코 누려서는 안되는 사치임을 자책했던 것이 아닐까. 아비가 되어선 안되는 자신이 아비가 되어 불안정하게 크는 아들들을 바라보며 말년에 이르러 고해라도,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작품을 쓰는 것으로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 속죄하며 스스로를 형벌에 처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아들은 자살로 죽었지만 그는 끝내 자살하지 않았다.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The Hours> 에서 로라 브라운은 어린 아들을 두고 자살하려 하다 마음을 거두지만 그 아들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로라는 가족을 다 잃을 때까지 살아 남는다. 그것이 오닐과 로라가 자처한 형벌이었을테니까.

이 작품을 잃고 한참을 흐느껴 울다 마음을 가다듬고 눈물을 닦았다. 아직 내 형벌은 끝나지 않았다. 오닐처럼, 로라처럼, 끝까지 버텨내야만 한다. 설령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고통이 닥쳐와도, 그것은 내가 자처한 일이리라. 그러니 내 몫의 형벌을 마칠 때까지, 하늘이 정한 이 어둠의 밤의 여로가 끝날 때까지 어거지로라도 기어가야만 한다. 어쩌면, 어쩌면 오닐은 마치 예수처럼, 자신의 희생 어린 이 작품으로 나같은 잉여 인간들을 죄에서 사하여 주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은, 혹은 이 극을 본 너는 아직 기회가 있다고, 네 손으로 가족을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소리쳐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살자. 밤의 어둠만을 바라보며 절망적으로, 억지로 살려 하지 말고 새벽이 올 것을, 동이 터올 것을 희망하자. 내가 아직 잊지 않고, 양손에서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 있다면, 나는 내 가족을 정말 너무나도,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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