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Observed: Stories and Sketches :: Doris Lessing

단체 모임이나 가족 모임 등 여러 사람과 자리를 함께 할 때, 나는 매번 견딜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곤 한다. 내 자신의 사회부적응이 일차적인 문제이겠지만서도 무언가 해야될 이야기를 안하고 있다는 가식적인 느낌을 받으면 그것이 그렇게나 불편하다못해 공포스러울 수가 없다. 가령 인터넷 소모임에서 만남을 가질 때 본명이 아니라 닉네임으로 소통하는 상황이 그렇다. 인터넷상에서도 닉네임이 아니라 본명을 쓰는 나는 오프라인에서조차 실명이 아니라 낯간지러운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 것에 좀처럼 적응을 못한다. 한두번 만남이면 모르겠는데 지속적임 만남에서도 그 상황이 변화지 않으면 이것이 정녕 사람과 사람의 만남인지 가면파티의 일환인지 알 수 없게 되버린달까.

그래서 나는 아무리 처음 만나고 상대에 대해 아는 게 없다해도 다짜고짜 이름과 나이와 사는 곳을 묻는다. 좋아하는 취미를 앞세워 공통의 커뮤니티를 들었다해도 내가 그 취미를 얼마나 좋아하고 얼마나 아는지 타자를 통해 확인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닌, 그리고 얼마나 더 많은걸 타자에게서 갈취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말그대로 커뮤니티,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내가 관심을 가진다는 것에, 좋아한다는 그 맹목성에 어떠한 오류가 있는지 타인의 시선으로 교정받기 위해서다. 그래서 타인의 생각을 알아야 한다. 그이가 어떤 존재인지 최소한의 정보만큼은 알아야 한다. 서로 모든 것을 다 알아야만 인간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나같은 사람은 상대를 그래도 알아야 내 이야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떠들어 대고나면 상대는 자신도 그만큼 이야기해야 한다는 요구, 혹은 강박관념을 느끼게 되버리는 딜레마가 적잖아서 요새는 내 이야기는 허공에 대고 하듯 딴청을 피우며 털어내고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주변부를 맴돌며 눈치를 보거나 관찰하는 일이 많아졌다. 금세 내 의도를 알아주고 자신의 얘기를 기꺼이 털어내주는 사람을 만나면 무척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당황하거나 기겁하며 뒤로 슬금 물러서는 이들이 더 많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더 좁히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며 그를 계속 관찰한다. 왜 저렇게 되었을까. 무슨 사연이 있을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걸까. 머릿속으로 수많은 추측과 추리를 하면서.

그러한 성향의 내가 읽은 레싱의 이 단편집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이야기였다. 런던탑, 런던브릿지, 빨간 이층버스 같은 랜드마크의 이야기가 아닌, 국지적 조직의 이야기가 아닌, 그 안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착실한 집안에서 착실한 모범생으로 자란 소녀가 부모 몰래 아이를 낳아 유기한 이야기도(데비와 줄리), 자신의 장애아 아이를 일반 학교에 보내고자 고집 피우는 엄마의 이야기도(장애아의 어머니), 부모의 속만 썩였던 자식의 이야기도(장미밭에서), 수다스럽게 떠드는 늙은 택시 운전사의 이야기도(폭풍우), 매력적이라고 칭송받는 여자들의 민폐도(늙은 여자 둘과 젊은 여자 하나) 모두 드러나 보이는 것과 속사정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레싱은 사소한 자연의 몸짓에서도 그 의미를, 이야기를 읽고자 한다. (참새들, 공원의 즐거움) 때로는 그만의 편견으로, 때로는 그만의 상상으로 지나쳐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꾸며내어 그들의 속내를 짐작해본다. (사회복지부, 응급실, 지하철을 변호하며, 새 카페, 로맨스1988) 그러나 섣불리 결말을 내지도, 단정을 짓지도 않는다. 인간 군상의 고집과 허영과 가식, 비겁함을 지적하면서도(원칙, 그 여자, 진실) 모든 일에는 순기능이 있다면 역기능이 있으며 포지티브가 네가티브를 만들고 네가티브가 포지티브를 만든다는 순리를 이해하고 납득시킨다. (자궁병동, 진실의 대가, 흙구덩이) 그래서 그가 보는 관찰의 시선은 매우 관대하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이야기를 할 때조차 따뜻한 포용력이 느껴진다.

만약 길을 가다 매우 매력적인 사람을 만나면 어떨까. 혹은 가까이도 가기 싫을 정도로 불쾌한 사람을 만나면 어떨까. 그 매력적인 사람이 그 외양만큼 추앙 받을만한 사람일까. 그 볼품없는 사람은 실은 거리의 천사가 아니었을까. 보이는 것으로 편견하고 잣대를 들이대는 우리에게 레싱이 제시하는 "관찰"은 겸허함이다. 내가 나 자신으로 그대로 보이고 싶다면 상대를 제대로 읽을줄 아는 혜안을 기르라는, 판단 내리는 그것에 늘 의문을 갖고 관심을 들이며 좀더 가까이 접근하라는, 보이지 않고 읽히지 않을 때에는 관대함과 이해와 용서의 마음으로 해독을 하라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있는 곳, 소속한 곳,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레싱의 메시지가 참으로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