そして夜は甦る :: 原りょう

하드보일드 장르를 개척한 것은 [말타의 매] 를 집필한 대쉴 해미트에 의해서이지만 수많은 장르팬에게 있어 '하드보일드' 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손꼽히게 되는 것은 단연 레이먼드 챈들러다. 샘 스페이드도 추리소설사에 길이 남는 캐릭터지만 필립 말로의 입체감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그는 고독하면서도 신사적인 현대 탐정의 전형성을 구축해 놓았고, 쿨하면서도 가슴은 뜨거운 남자다운 남자로 마초의 이미지를 재정립 했다. 처음 챈들러를 접할 때만 해도 마초를 바퀴벌레 보듯 혐오하며 극단적으로 날을 세우던 시절이었기에 비딱한 시선으로 말로를 대했었지만, 시리즈를 읽어갈수록 점차 그 마음이 누그러지며 '마초' 에 대한 개념마저 서서히 바뀌어 갔으니 이는 전적으로 필립 말로 혹은 챈들러의 공이라 하지 않을 수가. 온전히 남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여자인 내가 생각을 뒤바꿀 정도인데 정작 남자들에겐 어떨까. 그를 롤모델로 삼고 추종하는 무리가 여전히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다보니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을 쓰고자 하는 작가들이 부지불식간에 말로를 닮은 캐릭터를 양산해 내는 것 역시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설령 나름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해도 하드보일드 장르 테두리 안에선 싫든 좋든 끊임없이 필립 말로와 비교 당하게 된다. 챈들러와 말로의 열혈팬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던 하라 료도 자신이 집필하게 되면 이런 딜레마를 피해 나갈 수 없다는 걸 애초부터 알았던 것일까. 그는 처녀작부터 챈들러의 서술 방식과 말로의 캐릭터를 거의 그대로 베끼는 것으로 과감히 정면 돌파를 단행한다. 오히려 독자에게 '필립 말로를 의식하고 읽느냐, 의식하지 않고 읽느냐' 라는 딜레마를 넘긴 것이다. 의식하고 본다면 말로의 클론격인 사와자키는 말로에 비해 뜨내기 마냥 어설퍼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작가가 경륜을 갖춘 나이에 집필했다 해도 처녀작인 탓에 구성이나 서술면에서도 챈들러의 그것과 비교가 된다. 자칫하면 필립 말로 시리즈의 아류나 팬픽으로 치부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단정을 내리자니 어쩐지 석연치가 않다. 이미 탄탄한 입지를 쌓은 하라 료의 명성을 믿어서이기도 하지만 사와자키를 말로의 클론에 불과하다고 말하기에는 은근히 남아나는 매력이 있어서다. 작가도 그 점을 봐달라고 '말로라는 사나이' 라는 (조금은 속보이는) 오마주격 단편을 함께 수록한 것이 아닐까. 아예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를 모르는 독자라면 사와자키를 있는 그대로 봐줄 수 있겠지만, 필립 말로를 잘 아는 추리팬들에게라면 오히려 그렇게 잘 안다는 점을 맹점으로 말로의 고정 이미지를 차용하되 거기에 몇 가지 장점을 더해 더 근사한 사와자키 라는 캐릭터를 완성해낸다는 시너지 효과를 작가는 내심 소망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봐주는 독자에게 한해서겠지만, 나는 가급적 사와자키의 그런 장점만을 봐주고 싶다. 필립 말로만큼 근사한 남자가 하나 더 있다는데 아쉬울 게 무어랴. 필립 말로의 유명한 대사를 두고 '그런 감개에 남자 여자 따로 있나' 고 말한 것만으로도 어쩌면 사와자키는 말로보다 한 수 위다.

그렇게 캐릭터에 집중하다보면 내용은 차제가 된다. 미스터리 요소가 딱히 빠지는 것은 없지만 사건의 전개와 결말보다 사와자키의 행보와 시선, 생각에 더 관심이 쏠리고 어느새 그와 감정을 공유하는 것에서 작품을 즐기는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담배와 고독에 찌들어 어떻게 보면 구질구질 하다고도 할 수 있는 탐정의 모습이 전형성의 반복에 상관없이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는 뭘까? 현대 사회에 지치고 소외감을 느끼는 나(독자)의 고독을 누구보다도 이해 해주고 탐정의 직책상이라 해도 내 이야기를 꼼꼼히 들어주는데다 차마 말 못하는 숨겨진 부분까지 읽어내주고 감싸주며 심지어 문제까지 해결해 준다는 점에 있어서 대리만족과 위안을 얻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세상이 거칠어지고 메말라져도 온전히 믿고 의지 할 사람이 하나쯤 남아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 탐정소설의 묘미가 아닐런지.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현실에 그대로 반영될수록 사와자키 같은 탐정 캐릭터에 대한 갈망은 더 깊어진다.

자타칭 과작寡作작가라는 하라 료는 데뷔 이래 20년 가까이 에세이와 단편집을 제외하고 단 네 권의, 그것도 사와자키 시리즈만을 발표했다. (올해 다섯번째 시리즈가 나올 예정이었다지만 연말인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어 보인다) 1년에 10편은 써야한다고 독려하는 시마다 소지나 글쓰는 기계라고도 할 수 있는 아카가와 지로에 비하지 않더라도 잡지 연재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는 일본 작가 치고는 보기 드문 케이스다. 팬의 입장에서야 좀더 자주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오랜 시간 삭히고 달였다 나오는 만큼 하나같이 진국의 작품이라 하니 벌써부터 두 번째의 사와자키 시리즈가 못내 기다려진다. 말로의 그림자는 여전할지 모르겠지만, 말로에게 없는 현대 감각을 부여받아 훨씬 근사한 캐릭터로 성장해 있지 않을까. 이런 동경어린 마음의 말미에는 항상 아쉬움이 뒤따른다. 짝퉁이라도 좋으니 말로를 닮은, 사와자키를 닮은 한국형 하드보일드 캐릭터가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