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lington Park :: Rachel Cusk

동화 속의 여주인공들은 모두 '왕자' 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해피 엔딩', 행복한 결말이라 했다. 왕자가 어떤 성격인지, 결혼 이후의 생활이 어떤지 알 도리가 없는데도 '영원히 행복할 것' 이라니, 소녀들에게 이런 진실과 현실을 외면한 환상을 심어주는 동화에서부터 원죄가 시작된다. '왕자' 라는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평생 맘편히 살고 싶다는 바람은 소녀다운 순수함으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밑바닥이 깨진 욕구의 항아리를 마음 속에 빚어 평생토록 '영원한 행복' 에 대한 결핍감에 시달리도록 한다. '결혼만 하면 행복해질 것' 이란 믿음이 너무 충만하여 실질적인 결혼이란 현실에 부딪혔을 때 오는 괴리감을 '상실' 로서 받아 들이게 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 있어선 고전 동화에 의한 이런 환상이 드라마나 로맨스 영화 등을 통해 확장 되었다. 여성의 자아는 보다 발달 되었지만 '왕자와의 영원한 행복' 이라는 소녀적 동화의 주입식 사고를 버리지 못해 이야기는 반복 양산되고, 그에 따라 괴리감의 폭은 더 깊어지며 상실감은 급기야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의식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현대의 미혼 여성들에게 있어선 결혼은 자아 상실과 희생으로의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자와의 영원한 행복' 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것에 대한 기대를 버렸든 여전히 간직하든 그러한 조건이 마음에 들어와 있는 이상 결혼은 반드시 기대치에 부합해야 하거나 아니면 부정적일 수 밖에 없는 양날의 검인 셈이다. 이미 결혼해버린 기혼들은 현실에 부합하지 못하는 잉여 기대치를 모두 상실로서 계산한다. 그리고 이 상실에 넋을 잃고 자기 가치를 되찾지 못해 우울의 나락에서 서성이거나 아니면 생활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기를 쓰는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결혼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며 한없이 침체되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 적극성 때문에라도 곧잘 도드라진다. 이를테면 인테리아나 요리, 육아에 열을 올리는 경우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꾸며 나가는 일을 타인을 통해 인정 받아야 하며 타인에게 뒤처지지 않거나 혹은 우월해야 비로소 그 가치를 찾는다. 그러나 주변 반응이 기대에 못미치거나 자신보다 우월한 이를 만났을 때 극심한 허탈감과 패배감에 빠져들기가 쉽다.

이들을 겨우 자존하게 하는 것은 '남보다 내가 낫다' 는 의식 뿐이다. 옆집보다 더 좋은 집과 물건들을 가졌고 뒷집 아이보다 자기집 아이가 더 바르고 똑똑하다는 생각이 권태로운 하루를 버티게 한다. 타인의 소유 목록은 자신의 카탈로그가 되어 부지런히 위시 리스트를 갱신해 나가면서도 그 타인과 자신은 별개의 존재로서 구분되길 은밀히 소망한다. 무리지어 공동체를 형성하지 않으면 불안해 하면서도 쉽게 마음을 내주지 못하고 서로를 경계한다. 공동체를 이탈하는 사람을 험담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행여 그 공동체가 무너질까 노심초사 방어에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 어울리지 못하거나 이미 공동체의 허망함을 깨달은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을 찾지못해 주변을 맴돌다가 결국 집안으로 숨어들고 만다. 그러다가 어느덧 서서히 체념하며 '나' 도 아니고 '여자' 도 아닌 그저 집안을 쓸고 닦고 밥을 짓는 하우스키퍼로서 남은 생애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 무렵에는 '왕자와의 영원한 행복' 이란 꿈도 환상도 아닌 색바랜 어리석음이 되버렸을 따름이다.

이쯤되면 결혼은 미혼 여성에게 있어 공포다. 이 책에 나오는 알링턴파크의 여자들은 그저 '위기의 주부들' 이 아니라 좀비처럼 늪 같은 삶을 어적대는 존재로서 보여지게 된다. 고학력으로 좋은 직장에서 잘 나갔지만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이후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줄리엣이나, 결혼하여 꿈같은 집을 장만했지만 그 뒤로는 어떤 목표도 소망도 생기지 않는 어맨다, 미혼인 하숙생의 소지품을 훔쳐보며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절망하는 솔리, 대도시에 적응하지 못해 시골로 도망쳐 왔지만 별반 생활에 변화가 없어 의욕을 잃은 메이지, 그리고 무심한 남편 때문에 자신이 아니면 되는 일이 없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크리스틴까지 그녀들의 삶은 겉으로는 안정적일지 몰라도 그 내면은 황폐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하릴없이 쇼핑몰과 공원을 노다니지만 거기에는 그 어떤 평온함도 행복도 없이 그저 권태와 억눌린 우울뿐이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아이들은 기쁨을 주기보다 십자가가 되어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만을 더 안긴다. 남편들은 마음의 위로가 되기는 커녕 타인보다도 더 멀리 느껴져 그녀들은 그야말로 섬에 유배된 듯한 고독감에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그게 정말 결혼의 전부일까. 기혼의 입장으로 그녀들의 삶과 고통에 깊게 공감하면서도 그게 다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진다. 부정하지 않으면 지금의 삶에 의미없음을 인정하는 꼴이니 더더욱 저항감이 드는 것이겠지만, 그러한 부분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정말로 여자에게 있어 결혼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상당 부분 자아를 포기해야 하고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감수해야하며 가족을 위해 책임과 헌신을 다해야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상실로만 직결되지는 않는다. 상실감은 앞서 전제한 대로 지나친 기대치의 환상에서 비롯된다. 결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인데 '해피 엔딩' 이라는 안심어린 착각이 마음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놓는 것이다. 100%의 자아를 조금도 잃기 싫어 미혼을 고수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고 그 인생도 나름대로 충분히 얻는 것이 있겠지만, 50%의 자아를 내어줄지언정 그 분량만큼을 채울 인생의 묘미를 결혼을 통해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어느 쪽이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그러니 '영원한 행복' 역시 자신의 의지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알링턴 파크의 그녀들이 삶의 정체로 인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성장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작가 역시 결혼의 피폐함을 하소연하듯 여러 경우를 들어 얘기하다가도 '이러한 삶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라고 자조적인 결말 한 줄을 적어놓은 것이 아닐런지. 저 사람의 방식이 내 마음에 안들지언정 내 방식이라고 꼭 옳은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도 잘못된 방식은 없다. 다만 타인을 흉내내거나 비방하는 것으로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소용없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공허함을 메꿀 수가 없다. 자유로운 시절 가졌던, 지금은 잃어버린 것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저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것은 많다. 그것은 지나치게 기대하고 갈망하면 늘 부족하게 느껴지지만 마음을 비우고 손을 펴면 어느새 삶 속에 켜켜이 쌓여지는 것이다. 비록 상처투성이의 초라한 반쪽짜리 자아일지라도 스스로를 보듬으며 버티고 살아가는 삶은 여자라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결혼은, 결코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