Повести покойного Ивана Петровича Белкина
/ Пиковая дама ::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프랑스에 샤를 페로가 있고 독일에 그림 형제가 있다면 러시아에는 푸슈킨이 있다. 이렇게 말한다면 분류법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앞서 두 작가들은 동화 작가지만 푸슈킨은 그렇지 않다, 하고 말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비슷한 시기에 이 작가들을 접한 내게는 푸슈킨 역시 페로, 그림 형제와 같은 선상에 있다. 그가 시인으로서의 저서가 더 많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도 좀처럼 인식은 바뀌지 않는다. 그만큼 어린 시절에 접했던 인상이 강하게 굳어진 탓일거다. 오히려 페로, 그림형제와 푸슈킨은 따로 분류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가 더 충격이었달까. 푸슈킨의 다른 저작들을 접하지 못한 내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겠지만, 그렇다해도 어린이들에게 좀더 친숙한 페로나 그림형제에 비해 훨씬 거리감 있게 느껴지게 만드는 세간의 분류법이 왠지 모르게 아쉽고 쓸쓸하다. 사실 페로나 그림형제는 동화 작가 라기보다 민담가 혹은 풍자 작가이며 그 기준으로는 푸슈킨도 내게는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 주장을 뒷받침 하는 게 바로 이 책이다. 접근성 좋은 삽화만 없을 뿐이지 수록된 이야기들은 페로나 그림형제의 원전 민담이나 풍자극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어디서 들은 듯, 있을 법한 현실적 이야기들이어서 동화의 환상성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연으로 이루어진 설정이나 유령이 등장하는 고딕한 요소를 차용하는 것은 분명 초기 환상 문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 와 같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 구조로 구성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림 형제와 푸슈킨이 동시대 사람이라는 것도 당시의 문학 사조나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당시에는 독일과 러시아 간의 문화 교류가 활발했고, 독일 민화를 연구했던 그림 형제처럼 푸슈킨도 자국의 민화나 전설에 깊은 흥미를 갖거나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자랐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부 푸슈킨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 얼치기 독자가 내린 제멋대로의 판단이지만, 제 아무리 오래 연구한 학자라도 모든 문학의 시초가 전래되는 이야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용감하게 주장해보련다.

때문에 문학적 가치면에서나 작가 우대면에서나 민담가들과 푸슈킨은 같은 레벨이여야 된다고 본다. 그를 폄하하거나 동화 작가들을 굳이 격상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좀더 편하게 다가가는 길이 트였음 하는 바람에서다. 설령 푸슈킨의 여타의 저서가 소위 '어린이용' 이 아닐지라도 최소한 이 책만큼은 좀더 친근하게 알려지는 편이 좋지 않을까. 말마따나 [벨킨 이야기] 에서 [발사] 는 [몽테 크리스토] 를 연상시키고, [장의사] 는 [크리스마스 캐럴] 을 떠올리게 한다. [귀족 아가씨-농사꾼 처녀] 는 마치 셰익스피어의 희극 같지 않은가! 뒷편에 함께 수록된 [스페이드 여왕] 은 요즘 작가로 비유하자면 팀 버튼의 음산하면서도 재기발랄한 위트와 흡사성을 느끼게 한다. 개인적으로 팀 버튼을 알기 이전에 이 작품을 읽었을 때 그 재미와 매력에 빠져 열렬히 열광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아직도, 우연히라도 책장에서 이 책이 손에 닿으면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가 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되버리는,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전적으로 고딕 소설을 좋아하는 내 개인의 감상이니, 어떤 이에겐 등골이 오싹한 이야기로만 읽힐런지도.

가장 저명한 러시아 작가라면 단연 도스토예프스키겠지만, 나에게 1순위는 언제나 푸슈킨이다. 언제 읽어도 재미있는 이야기에 친근해서도 그렇고, 어쩌면 호남형의 외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슈킨의 다른 저서 읽기에 게을렀던건 이 책이 너무 좋아서였기 때문이라면 변명이 되려나. 가깝게 느껴졌던 동화가로서의 푸슈킨이 행여라도 어려워질까, 특히 시 읽기에 난색을 표하는 나에겐 그럴듯한 비굴함이었던 것 같다. 해서 올해는, 늦게나마 그의 다른 저서들을 하나씩 읽어 볼 요량이다. 안 읽은 것으로 거리감이 덜 느껴질거라 생각했다니, 다시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다. 당연히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에게 더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편견의 무게를 내리고나니 이젠 오히려 다른 책들에 대한 기대감에 가슴이 뛴다. 수많은 작가들이 찬사와 오마주를 바치고, 거대한 산맥 같은 러시아 문학사의 정점과도 같았던 그를 안다는 건 러시아 문학 자체를 좀더 알고 가까이 다가간다는 의미와도 같지 않을까. 그리하여 언젠가 누군가 러시아 문학을 권해달라 할 때, 자랑스레 '이 책으로 시작하라' 고 말해줄 날이 오게 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