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

세상은 점이 아닌 선이라는 끈이론을 들고 나타난 베네치아노의 천기누설을 통해 사람들, 우주의 외톨이였던 지구인들은 구원을 받았다. 내가 지금 하는 움직임이, 마음이, 메시지가 저 멀리 우주 너머에 있는 당신에게 반드시 전해진다는 그 말만으로도 내 행동가치, 존재가치의 당위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운명] 이라는 말로 제한된 삶을 더 옥죄려는 것이 아닌, 무한한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패스워드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곳에 속박 되어있는 것이 아니야, 맥없이 끌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야. 몸을 흔들어서, 격렬히 흔들어서 이 끈의 저쪽 끝을 잡고 있는 너에게 찌르르 파동을 울리게 하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까 고작 몇차례의 몸부림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이 너에게 전달될 것이 분명하므로, 내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어. 내가 너를 결코 외롭게 두지 않았으니.

이 소설의 모든 인물들은 이렇게 우주의 진리에 의해 하나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 주인공도, 그의 할아버지도, 그의 여자친구 정민도, 정민의 삼촌도, 한기복, 강시우, 레이코, 베르크씨 등등 모두 실낱처럼 가느다랗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확실하게" 이어져 있다. 그 선을 타고 벌거벗은 '입체사진' 이 흐른다.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따뜻한 라디오의 언어가 흐른다. 그래서 각자의 손에, 귀에, 눈에, 마음에 전달이 된다. 파동을 받아 또 다른 이에게 파동을 보내고 그 파동이 또 다른 이에게 전달이 되며 끝없이, 우주 끝까지 이어져가고 그 광대함이 지나간 기록을 사람들은 '역사' 라고 명명한다. 그래서 파동이 돌고 돌아 어느새 나에게로 다시 돌아올 때, 초라하고 소소했던 내가 어느새 역사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단지 죽을 힘만 남아 있었던 기력으로, 그저 목적없이 사랑만 했을 뿐인데도.

광주항쟁이 있었던 80년대에도, 여전히 최루탄 가루가 날아다녔던 90년대초에도, FTA와 비정규직 문제로 바로 엊그제에 분신자살이 일어나는 2000년대 지금에도 나의 위치는 평안하다 못해 안온했다. 동시대에 그러한 안온함과 생의 절박함이 공존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부조리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그 자리에 태어나 그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에 휘말려 고통받고 남은 인생마저 너덜너덜 찢겨지는 이들을 단지 '시대의 희생양' 이라며 무심히 쳐다만 보는 것이, 아니, 때론 외면 하는 것이 정녕 안온한 위치의 내가, 우리들이 할 도리인가. 그들이 그저 '우연적 존재' 에 지나지 않다면 나는 과연 무엇인가. 그들과 반드시 '연결되어 있을' 나는, 어쩌면 무감각하게 아무런 진동도 느끼지 못한 채 그들이 힘겹게 끌고 가는 개척지, 신천지에 요행 좋게 매달려 가고 있을 따름이 아닐까? 그들의 항쟁이, 투쟁이, 희망과 행복을 향한 버둥거림이 나의 삶의 안온함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가 있을까!

스스로의 무기력함을 견딜 수 없어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존중하고, 감사하고, 겸허히 들으며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 '우연적 존재' 들의 인생을 남루하다며 그 '우연적 인생' 을 자신이 비켜 나간 것에 대해 안심하고 마는 것이야말로 비겁하고, 치졸하고, 남루하다. 자신이 세상에 아무런 연결 고리 없는 외톨이를 자처했음을 자명하는 꼴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연결된 모든 선을 끊고 진리를 배반하며 오로지 홀로 살아나갈 수 있다 자신할 수 있는 이가 아닌 이상 '연결' 에 대한 의무를 져야한다. 그 연결된 선의 끝에, 전달 되어오는 파동에서 부조리를 느낀다면 의문하고, 해답을 갈구하고, 네가티브에 투쟁해 포지티브를 생산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상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즉, '모두인 동시에 하나' 라는 것을 증명하는 진정한 유물론이 아닐까. 유물론의 절대 가치는 "네가 누구이든 간에" "결코 외롭지 않다" 라는 명제가 아닐까.

가끔 일간지에 기고하는 사설과 개인 블로그, 번역해 내놓은 책은 꼬박꼬박 읽었는데 정작 작가 김연수의 개인 소설을 읽은 것은 이 소설이 처음이었다. 개인글이 가볍다는 의미는 결코 아닌데, 소설의 무게가 워낙 묵직해서 기존에 갖고 있던 이미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할까. 일독할 땐 자갈밭 마냥 읽는 길이 참 불편하고 어려웠는데 두번 읽고 세번 읽을수록 그 길의 아름다움이 보이고, 따뜻함이 보이고, 행복이 보인다. 덮어두었다 며칠 뒤에 아무데나 펼쳐 읽어봐도 또 한번 가슴에 남는 문구가 발견된다. 이러한 지성 작가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데 참 감사하고,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라는데 또 감사하다. 앞으로도 세상의 부조리 속에 나를 반성케 하고, 가야할 길을 제시해주고, 그리하여 나를 외롭지 않게 구원해줄 문장들을 써주리라는 기대 때문에 그렇다. 내가 누구든,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무기력한 존재인 나에게도 선을 이어 파동쳐 줄 그의 친절하고도 진정된 소통을 믿을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