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보면 이 책은 기존에 나온 <과학과 사회>시리즈 중

가장 인문적인 내용이 강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성을 둘러싼 기존의 담론들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출산의 역사에서 아이를 가지고 싶은 욕망과 부모가 되고 싶은 욕망에 이르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까지도 보듬고 있는 이 책은

그야말로 성과 가족과 관련한 역사의 핵심적 정리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도서관 서재에서 쌓여가는 먼지에 시달리며

낡아가는 두터운 이론서처럼 고리타분한 이론들이

즐비한 책은 아니다.

 

맹목적인 이론의 한계를 벗어난 실증적 논의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탓에 어느정도 속도감까지 있어

지루함이 끼여들 틈은 별로 없다.

 

모두 14명의 전문적 저자들이

제시하는 주장들은 사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매우 유용한 것들이다.

 

이따금씩 술자리 한켠에서 벌어지던

주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시대 역할모델중 가장 나약한 권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는

아버지의 자리를 찾아가는 논의는 지금도 곧잘 벌어지는

상습적 주제임이 분명하다.

 

이 주제를 풀어낸 정신분석학자 필립 제매는

아이의 성장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별과 구조화의 과정에서

아버지는 지금 시대에 이르러 특권적인 위치에 있는

필수요소는 아니라는 점을 은근히 주장한다.

그것은 가부장적인 모델을 벗어난 형태의 사회에서는

아버지역시 보완과 수정을 거친 새로운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내포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아버지의 자리가 변했다고, 혹은 자리가 없어졌다고 한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논쟁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필립 제매의 말 그대로

우리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은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고전적인 역할의 자리에 연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로운 것이 될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책에 옮겨진 다수의 논의들은

하나같이 귀에 담아둘만한 것들이다.

아마도 출생과 성생활, 그리고 결혼과 출산과 관련한

다양한 논의와 수다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이 책을 읽은 이들의 영향력은

이 책을 읽지 않은 이들보다 분명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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