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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말한다. 간절하면 가 닿을수 있는게 사랑이라고,

져도 아름다운 것이 사랑이라고,

성긴 눈발 한 송이가 닿아도 떨어지는 솔잎 같은 그런 것이 사랑이라고.

시인의 말이 유독 가슴을 파고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시인의 한결같은 마음앞에 부끄러움이 앞서기 때문이리라.

한때 마음속에 품어둔 한사람을 기다리며

무작정 집 앞을 지키고 섰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밤새도록 고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움이라 해도 좋았고, 어리석은 짝사랑이라 해도 좋았다.

종일 깡소주를 빈 속에 들이부으며 수도 없이

한사람의 이름을 되뇌이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그리움이 불이 되어 오장 육부를 애태우던 그 긴 시간들,

그 긴 터널같은 어둠을 지나 마침내 한 사람을 얻었고, 아이도 태어났다.

그사이 나는 서른을 훌쩍 넘어버린 사내가 되고 말았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마침내

연애하는 방법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린 그런 사내가 되고 말았다.

생일을 기억해 선물을 전하는 것 정도가

내 삶에서 건져올릴수 있는 연애의 전부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 일상생활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아내의 신발사이즈보다는 신용카드 번호들을 더 자신있게 외우게 된 나,

그런 내게 쉰 다섯의 시인은 일부러 자랑부터 늘어놓았다.

‘텃밭에 흙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라고.

텃밭이라는 노동공간을 빠져나와

금새 섬진강 봄물이라는 기막힌 연애공간으로 달려나갈 수 있는

시인의 생활은 그야말로 연애의 연속이다.

그 뿐이 아니다.

‘눈 내리면 우리 둘이 눈이 되어 강으로 가고 싶습니다.

나무들이 흘러가는 물을 가만히 지켜보는 강으로 우리 둘이 가고 싶습니다’ 라며

아내와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즐거움을 잃지 않겠다는

선서까지 남기고 있다.

내게는 까마득히 멀어진 줄 만 알았던 연애를

그렇게 날마다 시인은 즐기고 있었다.

그것은 반드시 도시생활에 찌들어 버린 후

줄근한 내 와이셔츠를 닮아버린 내모습 때문은 아닐 것이다.

시인과 같이 섬진강 산골에 있다 하더라도

난 여전히 통장잔액을 외우느라 정신없는 사내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대체 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변했을까.

내가 날 바라보기 힘든 연민에 힘들어할 새도 없이

시인은 느닷없이 날카로운 수술칼을 들고 내 심장을 향해 덤벼든다.

‘뭐 하니? 우리가 가진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빈 곳이 있다는 것을 안다’ 라는

외침과 함께. 사랑해서 결혼하고, 사랑해서 아이를 낳고도

내내 시든 꽃처럼 재미없이 살아온 것은

어쩌면 무엇으로도 채워지 지 않는 빈 곳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더 정직하게 말하면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3평 아파트, 콘도회원권, 알맞은 적금과 주식,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달려온 걸음들이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말하고 싶었던 오기인지도 모른다.

사실 제법 사회생활에 익숙해지면서부터 난 주기보다는 받는 것을,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는 쪽을 택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내걸음의 움직임은 늘 무겁고 정교해야만 했었다.

연약하고 여린 연애감정을 끼울 틈새가 내게는 없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달랐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세월을 따라 스치는 모든 것들을 소중히 감싸며 살아온 것이다.

맞다. 어쩌면 그것이 연애의 정수일지도 모른다.

낮으면 낮은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만나지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안으며 달려가는 길, 그 길이 분명 연애의 길인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세월이 가면 길가에 피어나는 꽃 따라 나도 피어나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흔들릴라요’ 라고.

내가 누군가를, 내가 무언가를 어찌하겠다는 다짐은 애초에 시인에게 없다.

그저 강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흐르면 흐르는 대로,

멈추면 멈추는 대로 살아가겠다는 다짐,

그것이 시인의 시가 되고 밥이 되고 연애가 된다.

하지만 시인도 하늘아래 똑같은 사람이려니

왜 속타는 고민이 없고 가슴아픈 후회가 없을까.

아무리 지상연애주의자라 해도 왜 시리고 저린 마음이 없을까.

시인의 몸에 남아있을 생채기를 굳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시인앞에서 자꾸만 움츠려지는 내 오기의 마지막 발악이다.

마침내, 마침내 난 찾아냈다.

‘불 꺼진 방에 달빛은 가득했고, 소쩍새는 밤 새워 울고,

강물은 내 시린 가슴에 길을 내며 흐르고, 내여자는 없고’ 어렵사리 찾아낸 시인의

고백뒤로 채 아물지 않은 생채기를 엿보는 것은 제법 즐거운 일이 되고 만다.

한없이 평화로울 것 같던 시인의 마음에도 외롭고 아픈 마음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시린 가슴에 강물이 길을 내고 흐를 정도로 말이다.

뭔가 발견했다는 기쁨에 들뜬 내눈은 급기야 시인의 통곡을 찾기에 이르렀다.

‘그대 두고 돌아오는 길, 사람 하나 없는 달빛 아래, 김제만경 보리밭 보며 울었습니다’

어두운 길에 눈물흘리는 사내의 마음이여

다른 이유를 갖다 댈 이유도 없이 적당히 통속적이지 않은가.

사탕단물같은 끈적하고 달콤한 연애를 지나는 길에

걸려있던 외로움의 덫에 시인역시 보기좋게 걸려 주저앉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생채기를 가학적인 심정으로 즐겼던 나는 또다시 헷갈린다.

시인은 왜 여전히 연애를 그만두지 않고 있는 것일까. 지칠만도 한데,

아니 그만둘 만도 한데 말이다.

난 아내와 연애하는 것에도 지쳐 두손을 들었는데,

시인은 어떻게 사람을 떠나 세상 모두와 연애하려고 덤벼드는 것일까.

그러다 나는 깨닫고 만다.

나의 연애와 시인의 연애가 본디 다른 길에서

출발한 것임을 무릎을 탁치며 깨닫고 만다.

‘무슨 말로 정리하랴. 어두워도 보이는 얼굴이 있을까. 어둔 산 쪽을 바라본다. 기다리는 것들은 오지 않음을 알면서 나는 날마다 산을 기다린다’

그렇다. 시인의 연애는 조건없이 기다리는 것에서 시작해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끝난다.

같은 기다림이, 같은 아픔이, 같은 생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연애의 고민이 아니라

누군가를, 무언가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가 연애의 고민의 되어야 하는 것인줄

나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시인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산그늘처럼 걸어가는 일만큼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없다’ 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자신이 없다. 나는 자신이 없다.

내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연애를 흔들어 깨운다 해도

여전히 돈과 명예가 으뜸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사회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

사랑이 최고라고, 연애가 전부라고 말 할 자신이 없다.

여전히 내 편과 남의 편을 가르며 살아갈 것이고,

이득과 손해를 따지며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 난 연애를 할 것이다. 아니 해야겠다.

세상 전부와 연애를 걸 수는 없을테다,

딱히 알 지도 못하는 이들과 연애를 하지도 못 할 것이다.

단지 내 가장 가까운 아내와 내아이와,

그리고 나를 지켜봐 준 고마운 이들과 연애를 할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돌아서도, 당신이 내 앞에 서있는 것처럼

당신이 아무리 돌아서도 나는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랑이고 싶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그렇게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내마음을 퍼주며 한동안 잊고 있었던 연애를 시작해야겠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지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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