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방법』의 저자 '히라노 게이치로'의 말에 의하면, 책의 첫장은 작가가 그리는 그림의 집약이라고 한다.

그래서 찬찬히 읽었다.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리듬감이 느껴지는 시작이다. 후반부에 접어서는 전반부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음에도  무거워진 발걸음 만큼이나 전달되는 곡조가 곡소리로 들린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책 소개를 통해 알게 된, 1974년 4월에 일어난 제2차 인혁당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 소설은 1981년 부림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군사독재 정권이 통치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일어난 이 사건들을 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던 《변호인》 송강호의 대사와 함께 '국민이 미개하다고 해서 민주주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에 동의 할 수 없다.' 라던 말이 칼날처럼 가슴에 박혔다. 영화 《변호인》처럼 이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그날의 상흔은 역사를 증언하는 것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 이다.

 

소설은 '오래전 그곳에 삼악산이 있었다.'라는 것을 회상하며 운을 땐다.

 

오래전 이곳에 삼악산이 있었지

북쪽은 험하고 가팔라 모르네

남쪽은 산을 파내고 큰 길을 뚫어

골목마다 채국채국 집을 지었지

그래 봤자 동네 이름이 삼벌레고개

 

오래전 이곳에 삼악산이 있었지

북쪽은 험하고 아득해 모르네

남쪽은 사람이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가 사람 집에 들어가 산다네

그래 봤자 토우의 집은 캄캄한 무덤

곡소리처럼 들리는 이 곡조가, 전반부에서는 생동감으로 다가온다. 삼악산을 터전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옥의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사람 사는 냄새가 넘실넘실 실려 온다. 사람 사는 곳이 어딜가나 똑같듯 왁자지껄한 소리에 정신 사납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는 서로 으르렁 대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아웅다웅 하고, 손발은 허공에다 돌팔매질을 한다. 위의 곡조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북쪽은 험하고 아득하고 가팔라 '모르고' 남쪽은 잘 살아 보기 위해 만든 것들이 '제 무덤'이라고 한다. 화자는 에두르지 않는다. 북괴의 지령이니 간첩이니 그런 것들에 대해.

 

소설은 윗쪽에 사는 극빈층을 사납고 거친 존재로 다룬다. 왕래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저갱이라도 되는 듯이 여긴다. 이와 반대로 남쪽은 강을 끼고 개발이 이루어진 최상위계층의 주거지로 몸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탁상론자들의 은신처처럼 비유 된다. 소설은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준빈곤층의 삶을 어린 스파이들의 시선을 통해 조우하게 한다. 말이 준빈곤층이지 언제든지 미끄러질 수 있는, 일곱살 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이 통통하게 찐 거대한 피구더기가 나오는'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상기 시킨다. 이상은 평화롭지만 역사는 폭력적이다라는 문구처럼, 인간의 역사는 그 폭력으로 굴러가는 것 일까?

 

우물집 둘째 아들 은철이네 집에 새댁네가 이사를 왔다. 계주이자 우물집 안주인인 순분은 어쩐지 잘난척 하는 것 같은 새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녀자 답지 않은 필체하며, 가족끼리 존대하는 그 모양새가 영 못마땅하다. 새댁에게는 영과 원 두 딸이 있는데, 우연찮게도 순분의 두 아들 금철과 은철의 나이와 같다. 치기 어리게 영에게 못되게 구는 금철과 달리, 은철은 원과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하고 동네 비밀을 조사 한다. 이들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을 수집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데, 이는 저주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 한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그들의 수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따분하고 놀이가 되어주지 못했지만, 이것은 어느날 갑자기 간첩이 되어 사라져 버린 이들의 이름을 찾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연사한 뚜벅이할배, 홀연히 사라진 똥순할매, 행방이 묘연한 똥순할매 아들 그리고 하꼬방 청년. 어지러운 소문을 나르는 보험사와 계원들. 그들의 불안함을 좀먹는 임보살.  

 

사건은 물갈기를 흩날리며 내동댕이 쳤다. 우상처럼 따르던 형 금철의 실수로 불구가 된 은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숟가락을 던져 우물에 묶이는 벌을 받게 된 원. 공포와 분노로 우물 벽을 새차게 긁었던 손톱은 깨져 피로 얼룩지고 터진 입술 사이로 피비릿한 말을 내뱉은 상황은 아이들의 삶에 전환점이 되기에 이른다. 순분이 새낵네 시누이 이야기를 계원들에게 전하며, 앉은뱅이가 되어 움직일 수가 없으니 똥이 딱딱하게 굳어 나중에는 젓가락으로 파냈고 이에 괴로웠던 그녀는 자살을 했더라는 이야기를 통해 수치심을 넘어 '사람답게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작가는 어쩌면 이 장면을 통해 공수래공수거, 인과응보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제 흉 들어날까 두려워 남의 살 깎는 것을 서슴치 않았던 통장 박가네를 보면, 어린 은철이 상처 입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억지로 원에게 생닭발을 먹이게 하는 장면과 다를바가 없다. 무튼 은철과 원에게 일어난 각각의 사건은 그들을 고통에 빠트렸고, 갑자기 사라진 원의 아버지의 사건 진상이 밝혀지면서 아이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발 없는 무성한 소문은 덕규를 데려오지 못했고, 그럴수록 새댁은 점점 미쳐갔다. 그리고 덕규의 시체가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저주로 인해 아버지가 그렇게 됐다고 믿는 원은, 인형인 동생 희와 대화를 하며 사람들과 벽을 쌓는다.

 

결국 이사를 가는 영과 원 그리고 희를 마을 사람들은 숨어서 지켜 본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또, 또,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고, 그렇게 다 있는 거란 말이에요! (p.274)

각기 다른 놈, 놈, 놈이 모여 부비며 사는 세상인데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고 얼굴을 숨긴채 날카로운 소문을 만들어 내는 이들의 칼날은 또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겨누어 질까? 사람의 가치를 믿고  우선시 했던 믿음이 흔들린다. 누가 경찰에 끌려갈까 싶어 흘기는 그 사이사이에 벽은 더욱 더 견고하고 높게 올라 간다. 떠나옴과 떠나감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갑작스레 훌쩍 커버린 아이들의 속내를 누가 보다듬어 줄 수 있을까? 너무 빨리 급하게 늙어 버린 것 같다. '오래전 그곳에 삼악산이 있었다.'라는 말을 내뱉는 노인을 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언제까지고 오늘 일 것 같은 오늘이 사라졌다. 빛을 잃었고 색은 바랬다. 그저 여기저기 배설 된 똥만 가득하다. 누가 그 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배 속이 비면 배를 채워야 하고

귓속이 차면 귀를 후벼야 하지

옴삭옴삭 밥은 퍼먹고

살곰살곰 귓밥은 파내라

알공달공 디어라 에헤야 디야

 

배 속이 차야 남의 일을 잘 돕지

귓속이 벼야 남의 말을 잘 듣지

뚝딱뚝딱 배를 만들고

출렁출렁 귀밝이술을 빚어라

알공달공 디어라 에헤야 디야 (p.62)

배를 채우고, 귀를 후벼파서 고통을 덜어내고 삶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지금 누가 내 옆에 있나? 그를 위해 손을 내밀 수 있나? 고통은 그렇게 덜어 간다. 개 발싸개 같던 모든 것들이 그렇게 버려진다. 소설 속 괴상한씨가 부르던 노래가 결국 작가의 메시지가 아닐런가.

 

권여선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다. 단번에 팬이 되어 버렸다. 이를 순수문학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은 그저 읽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 이라는 것을 일깨워준 멋진 소설이다.